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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30일 10시08분에 백령도에서 촬영한 사진

어느 날, 컴퓨터의 자료를 정리하던 중 많은 사진자료가 삭제되어 버렸다. '아차~!' 싶어 복구하자니 컴퓨터 본체를 강남으로 보내야 하고...... 그냥 남은 사진이나 찾아 보자는 식으로 하드 드라이브를 이곳 저곳 서핑하다 보니 서너 장의 사진이 발견된다. 그 중 특이한 사진을 이곳에 올려본다. 

[(세멘트로 덧칠하여 보이지 않지만 반공) 방첩, 신고하여 애국하고 유신으로 번영하자]

간첩을 막아내자는 방첩, 그 간첩을 잡기 위해 신고를 생활화하며, 유신을 실천하여 나라를 번영시키자는 내용이다.  

지금은 창고로 쓰이는 듯한 시멘트 경량벽돌의 벽면에 페인트로 쓰여진 글귀였다. 지난 2014년 10월 30일 10시08분에 백령도의 용기포 항으로 진입하는 항구 주변 집 뒤편에서 발견하고 사진으로 남긴 것이었다.  1970년대에는 도처에서 이러한 구호들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자료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과거  내가 초.중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10월 유신이 나라를 구하기 위한 대통령의 특별선언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당시 급격한 산업화로 금융공황적 자금난, 저임금 등으로 인한 생존권 문제 대두, 닉슨 독트린으로 인한 미국 개입정책의 후퇴 등으로 북한에 대처하고 경제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우리만의 자구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명목이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여졌기 때문이었다.  

10월 유신의 긍정적인 측면은 경제적 도약의 기반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물론 노동자들의 값싼 임금과 노동운동 및 정치활동 제한 등의 부작용이 뒤따랐다. 이러한 문제들을 차치하고 경제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자면, 지금 우리의 경제적 발전이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개발효과를 톡톡히 봤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다.  

세멘트로 덧칠되어 없어진 반공 글자 자리

당시에는 북한보다 못 살았지만 지금은 경제적으로 북한보다 풍요롭고, 세계에서 인정받는 나라로 발돋음했다. 물론 당시의 정치적 목적도 간과할 수 없지만 남의 허물을 들쳐내서 뭐 하겠는가? 그냥 그때를 회상하며 옛 추억에 잠겨보고 싶을 뿐이다. '모든 것은 생각하는 대로 이뤄진다'는 생각으로 긍정적인 마음을 갖기로 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긍정적이면 몸도 긍정적으로 변한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은 얘기하고 싶다, 아래의 글처럼.

유신체제가 비난받는 이유는 1971년 12월 6일 취해진 '국가비상사태 선언'에서 '첫째도 안보, 둘째도 안보, 셋째도 안보'라는 내용을 밝히면서,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첨부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다음 해 12월 27일 유신헌법이 개정, 공포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인간은 반인륜적 범죄 등과 같은특정한 아주 특별한 사안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이유로든 자유의 일부가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칫 오만과 독선에 빠지기 쉽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다수결의 원칙이다. 승자의 원칙인 다수결은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며 짓밟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잘못하면 독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지 않도록 끊임없는 대화와 소통을 통해 소수의 자유도 보호하도록 개개인들이 자신의 인격을 고양시키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사회는 아름답고 매력 넘치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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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도가 아닌 비구니 스님들의 걷기 여정

# 불교 비구니 스님들 고행을 자처하다.

프랑스 생장에서 첫발을 내디디면 힘찬 '산티아고로 가는 길' 트레킹을 시작했다. 피레네 산맥을 걷고 있을 즈음 눈에 띄는 두 분 승려! 그 분들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하며 기념촬영을 청했다. 두 분 승려는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걷고 또 걷는 고행을 자처하고 있었다. 가톨릭교도로서 불교인의 참모습을 보는 듯 하여 가슴이 뿌듯해 졌다.  

뒤로 구름이 우리의 발 아래다. 지인, 지영 스님과 함께

고행이란 무슨 의미일까? 그 원인과 분석을 하기에는 지면도 부족하고 시간도 없다. 그냥 간단하게 한 마디로 요약하고 싶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제 한 분이 있다. 그 분은 수원교구의 이기수 요아킴 신부님이시다. 이기수 요아킴 신부님께서는 "불교는 고통으로 인하여 해탈하고, 기독교는 고통을 통하여 부활한다."라고 말했다. 종교적으로 깊이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 뜻을 쉽게 이해할 것이라고 믿는다. 

# 우문에 현답을 하다.

불교 승려가 가톨릭 성지를 순례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쳐질지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날이 밝자 스님들께서 잘 걷고 계실까? 하는 생각에 까미노(camino, 순례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스님은 어디쯤 오십니까?"하고 묻곤 했다. 드디어 한 바(Bar)에서 잠깐의 시간을 보내고 나오는데, 지영 스님이 바 앞의 철제 의자에 앉아 계셨다.  

스님과 대화를 하던 Bar 앞의 노상 의자

너무 반가워 인사를 드리고 잠시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스님! 불교 지도자이신 스님들께서 가톨릭교도의 길로 알려진 까미노를 걷고  계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대답은 간단했다. "성인을 찾아가는 길이잖아요." 스님께서는 성인의 위대한 업적은 종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없다는 간단한 진리를 확인시켜 준 것이다. 역시 우문에 현답이다. 

# 친절과 사랑을 베풀다.

뻬르돈Perdon 언덕을 향해 오르기 시작할 즈음 한 구멍가게에서 스님이 나를 보고 묻는다. 나에게 말을 건네며 반가운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리도 길고 키도 크신 분이 아직 여기 계세요?"라고 말이다. 나는 웃으며 "스님 두 분 다시 만나려고 천천히 걸었죠."라고 말했다. 스님들이 웃으신다. 그리고 네게 구멍가게에서 방금 산 오렌지와 사과를 주신다. 친철함과 더불어 나눔도 실천하고 있었다.  오는 말이 고우니 가는 말도 곱다. 

이 나무그늘 아래서 스님이 준 과일을 은정모녀와 함께 먹었다.
뻬르돈 언덕, 일명 용서의 언덕 정상

로스 아르꼬스Los Arcos의 산타마리아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려는데 앞에 두 분 스님께서 앉아 계신다. 두 분은 성모송을 부르며 성당 외부의 정원을 한 바퀴 도는 데에도 두 손을 합장하고 뒤를 따랐다. 남의 종교를 비난하기에 앞서 그 종교를 몸소 체험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두 분 스님! 종교에 경계와 반목이 없음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그날 밤 두 분 승려를 위한 기도를 하느님께 드렸다. 

로스 아르꼬스의 성당에 앉아있는 두 분 스님

# 오욕 중 하나만 버려도 큰 거여요.

지인 스님이 내가 어머님의 영정사진을 들고 순례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내게 한 말이다.

"신께서 어머니의 영혼을 틀림없이 보살피실 겁니다. 어머니께서도 지금 이 길을 함께 걷고 계실테니까요. 인간이 가장 떨쳐버리기 힘들다는 오욕(식욕, 수면욕, 색욕, 탐욕, 명예욕)중에서 생리적 욕구 3개를 제외하면 탐욕과 명예욕이 남는답니다. 그런데 들어가기 힘들다는 대학 교수직도 그만두고 어머니의 영혼을 모시고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탐욕과 명예욕까지 버린 겁니다. 오욕 중 하나도 버리기 힘든데 그걸 다 버리고 이 길을 걷는 결단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이 길을 걸으며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레온Leon에 도착했을 때 지인 스님의 문자를 받았다. 문자 내용을 소개해 본다.

"원래 계획은 되도록 가톨릭의 저녁미사에 참석할 계획이었으나 걸음이 늦고 많이 지쳐서 이따금 들리는 작은 성당에서 기도드려요. 그리고 묘지 주변을 지나칠 때에는 그 분들의 영면을 기도합니다. 그럴 때마다 당연히 귀하 어머님의 영면을 기원했고, 앞으로도 기도 드리겠습니다. 환한 미소와 열린 마음으로 저희를 반겨주시고, 정성을 다해 저희를 축복해 주셔서 앞으로 남은 여정을 흔연하게 잘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머님과 함께 하는 여정 늘 축복 받으시길 기원드립니다."

# 인연은 이어지다.

산티아고 대성당에 아마 내가 2일 정도 먼저 도착한 것 같았다.  첫날 생장에서 같이 출발했던 사람들이 이제야 속속 도착하기 시작한다. 그때 허전한 생각이 들어 휴대폰을 보니 지인 스님의 문자가 한참 전에 와 있었다. 즉시 성당 옆의 분수대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뛰어가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두 세 번을 허탕치다 늦은 밤에야 만날 수 있었다. 

황량한 들판을 배경으로 서있는 두 분 스님

두 분 스님은 내가 다시 포르투갈 파티마를 둘러보고 포르투(Porto)에서부터 순례를 시작한다는 말을 듣고 걱정이 됐던지 비상약품과 된장 등을 건네주며 축복을 기원해 줬다. 그리고 귀국하면 꼭 한 번 사찰로 놀러오란다. 스님들의 염려덕분으로 포르투갈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종교와 무관하게 야고보 성인의 무덤을 찾아 순례를 계속하신 두 분 스님들에게도 신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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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의 '산 니꼴라스 엘 레알 수도원'

지난 2019년 예능 종편방송인 tvN에서 '스페인 하숙'을 절찬리에 방영한 이후 2020년 하반기에 재방송됨으로써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산티아고 대성당을 5번이나 입성했던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 하숙에서 방영된 내용을 문의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에게 질문했던 내용을 이곳에 정리해 보기로 한다.  

1. 스페인 하숙 촬영장소는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

한 마디로 tvN의 '스페인 하숙' 촬영장소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200km쯤 남겨둔 까미노 상의 쾌적한 마을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입니다. 그러니까 생장피드포르에서 걷기 시작한 순례자라면 프랑스길 전체 여정 800km중 600km정도를 걸어왔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죠. 

누에보 다리
산티아고 가는 까미노를 따라 펼쳐진 카페거리
후작의 성

이곳은 하천을 끼고 있는 조용한 마을로서 인구는 적은데 비해 수도원 2곳, 성당  3곳, 후작의 성 등 비교적 큰 시설이 들어서 있습니다. 유해진 씨가 누에보 다리 밑을 통과하는 산책로를 따라 조깅을 하기도 했고, 또한 유해진, 차승원, 배정남 등 유명 연예인이 휴식을 취해던 카페 광장은 한적하고 쾌적하답니다. 

2. 스페인 하숙집은 산 니꼴라스 엘 레알 수도원Convento San Nicolas el Real

그렇다면 스페인 하숙에서 하숙집으로 사용했던 알베르게Albergue는 어느 시설에 있었을까요? '산 니꼴라스 엘 레알'수도원이었습니다. 17세기에서 18세기 동안 건축된 곳으로, 이 수도원 건립자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크리스또 데 라 에스페란사Cristo de la Esperanza'(희망의 그리스도)가 보관된 곳이라고 합니다. 

산 니꼴라스 엘 레알 수도원Convento San Nicolas el Real

위 사진에서 붉은 원형으로 표시한 곳이 스페인 하숙집의 출입구입니다. 이곳을 통해 순례자가 측면을 돌아 유해진, 차승원, 배정남이 운영하는 하숙집, 즉 알베르게로 들어갔어요. 순례자들은 사진의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걸어가도록 순례길이 펼쳐져 있답니다. 그런데 이 하숙집은 마을의 거의 끝부분에 있어서 사람들이 별로 오지 않았어요. 이곳을 tvN 나영석 PD 등이 빌려서 알베르게를 차렸고, 그 장소에서 촬영을 진행했답니다.  

마을 초입에 있는 시립 알베르게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지친 발걸음으로 이곳까지 옵니다. 너무 지친 나머지 더 걸어갈 여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알베르게에 대해 특정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면 마을 초입에 있는 곳으로 들어가게 돼 있답니다. 이곳 바로 곁의 산티아고 성당옆에도 사설 알베르게가 있어요. 이런 알베르게를 다 지나쳐서 마지막에 있는 곳이 스페인 하숙이었기 때문에 순례자들이 그곳까지 가지를 않았던 겁니다.  

3. 산티아고 성당Iglesia de Santiago이 이곳에도 있습니다. 

중세에는 순례가 곧 삶이었습니다. 삶이 종교였던 시절에는 죽기 전 순례는 거의 필수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죠. 유럽 등지에서 온 순례자들은 장기간의 여정에 피로에 찌들었고, 지쳤고, 병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순례를 지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곳 산티아고 성당의 용서의 문을 통과하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받는 것과 동일한 축복과 대사면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마을의 산티아고 성당 뒷모습

이곳 산티아고 성당은 이글레시아Iglesia로 표기됩니다. 이글레시아는 영어로 church입니다. 그런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있는 산티아고 성당은 까떼드랄Catedral입니다. 영어로 cathedral이랍니다. 즉, 이글레시아는 사제가 있는 성당이고, 까떼드랄은 주교가 기거하는 대성당을 일컫는 거죠.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마을의 산티아고 성당 앞 모습

그러나 요즘은 의학의 현대화 등으로 이곳에서 축복과 대사를 받고 순례를 종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말 힘들어서 포기하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종교적으로 이곳에서 미사를 보고 축복을 받은 뒤 집으로 가는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요즘은 걷기 힘들면 버스를 타고 약간의 거리를 점프하기도 한답니다. 

다음에는 알베르게Albergue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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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 산책로의 단풍

내가 이곳에 살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산책로가 한산하고 여유롭기 때문이다. 원래 밤에 산책을 하는 것이 나의 습관이었으나, 오늘 만큼은 오후 늦은 시간에 산책을 하고 싶었다. 산책하는 내내 다른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아마도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사태 때문에 사람들이 외출을 꺼려해서 그런 듯하다. 

쓸쓸한 가을 산책하는 사람도 없어

산책길은 쓸쓸한 가을정취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계절도 세월의 흐름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그토록 덥고 뜨거웠던 여름이 언제였던가? 여름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푸르른 녹음은 지나갔고, 울긋불긋한 색조가 온통 세상을 덮었다. 일상의 기온과 세상의 색깔은 가을을 선호하게 만들지만, 왠지 세월이 빨리 흘러간다는 느낌만은 지울 수 없다. 

땅거미가 지는 가운데 억새풀이 아름다워

나이가 든다는 생각은 앞으로 살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롭고 고독하게 느껴지는 가을에 자신이 늙어감에 대해 서글픔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늙어가는 만큼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고, 그 만큼 지혜로워 질 수 있음에 다소나마 위안을 삼는다. 그래도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힌 세상을 보면 걱정이 아니 될 수 없다.

억새풀이 아파트 보다 키가 커

이제 100세 시대를 눈 앞에 두고 있지 않은가! 오래 살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마음의 풍요도 중요하지만 경제적 풍요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아픈 데 병원에 가지 못한다면,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할 수가 없다면, 그리고 자녀들로부터 소외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경제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철학자들은 마음의 풍요가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경제적 풍요가 더 절실한 것이 사실이다. 

가을의 결실 대추도 울긋불긋 물감으로 채색돼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탁자 위에 붉은 물감으로 색칠된 대추가 놓여있다. 요즘 대추는 사과대추니 가분수대추니 해서 그 크기가 장난이 아니다. 대추를 입에 무니 그 단맛이 미각을 자극한다.

아들 녀석은 이미 품을 떠나 독립했고, 딸아이는 박사과정 공부다 해서 얘기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고, 아내는 혼자의 삶을 통달하기라도 한 듯 남편은 눈 밖의 존재인 듯하다. 나 홀로 남았다. 이제야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만물이 시들어가는 가을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래도 사는 것을 무거워 하지 않고, 홀로 됨에 서글퍼 하지 않으며, 혼자만의 여유와 느긋함을 즐겨보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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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 앞에 피어난 붉은 명자나무 꽃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부는 어느 날, 한적한 시골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꽃이 유난히 붉게 빛난다. 시골집 주인이 시골스러운 정취를 배가시키려고 하는 듯 허름한 벽면에 대나무와 망태기를 덧붙여 촌스럽게 장식해 놓았다. 그러나 그 촌스러움이 주는 매력이 도시의 세련됨보다 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이제는 콘크리트 건물보다 풋풋한 흙냄새가 풀풀나는 토담집이 더 정겹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그 시골집이 촌스러운 자연미만 가진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더 화려하고, 더 선정적인 정열을 과시하는 붉은 명자나무 꽃~! 그 도발적인 화려한 색조가 이곳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유혹하고 있다. 소박함 속의 화려함으로 대조적인 부분을 더 강조한 탓일까? 하여 나같은 순진한 사람조차도 그 곳에서 발길을 멈춘 채 사진을 찍으며 풍경을 감상하느라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중국 원산이지만 이젠 귀화목으로 정착

귀여운 봄의 요정 클로리스를 시샘하는 꽃샘추위 탓일까? '애기씨꽃' 또는 '아기씨꽃'이라고도 불린다는 이 꽃은 꽃샘추위에 상기된 아가씨의 볼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면 꽃의 여신 플로라의 총애를 받는 요정이라 가장 붉고 화려한 꽃봉오리를 터트려 뭇 남정네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지도 모를 일이다. 옛말에 '명자나무 꽃이 피면 아녀자들이 바람난다'하여 담 안에는 이 나무를 심지 못하게 했으니 하는 말이다.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한 명자나무는 장미과의 낙엽관목으로 3종만이 지구상에 존재한다. 이 3종의 명자나무는 3나라에 분포하는데 중국, 한국, 일본이다. 이 나무는 그 정열적인 아름다움과 더불어 전형적인 동양의 정원수로 자리잡았다. 우리나라의 자생종이던 풀명자와 귀화목으로 정착해 버린 명자나무가 이제는 더 이상 중국 원산이라는 말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한국형 관목으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명자나무 꽃을 사진으로나마 바라보며 북풍의 신 보레아스가 몰고 올 차가운 바람을 예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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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대성당 앞을 성모상을 앞세우고 행진하는 신도들

일반적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곳은 비교적 가까운 포르투갈의 파티마 성모 발현지다. 산티아고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간단히 버스를 타고 포르투(Porto)까지 와서, 그곳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파티마(Fatima)까지 간다. 산티아고 버스 터미널에서 물어보면 가는 방법을 상세하게 가르쳐 준다. 산티아고 트레킹을 마치고 2일 정도 여유기간에 방문하면 좋은 곳이라 여기에 소개해 본다. 

 

1. 로마 교황청이 공식 인정한 세계 3대 성모발현지 중 파티마는?

세계 3대 성모발현지는 1531년에 발현했던 멕시코의 과달루페Guadalupe, 그리고 1858년의 프랑스 루르드Lourdes, 마지막으로 1917년 포르투갈의 파티마Fatima였습니다. 1917년 5월 13일 세 목동 앞에 발현하신 성모께서 사람들에게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그해 10월 13일을 지정했죠. 그날 기자들을 포함한 7만여 명의 관중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비바람이 물러가고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땅은 바짝 말랐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태양이 구름을 뚫고 내려와 회전하며 찬란한 색의 향연을 펼쳤으며, 하늘에는 성인들의 모습도 비춰졌습니다. 언론들은 '파티마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호외를 발간하기도 했었습니다.

#최초의 성모 발현은? 

성모 마리아께서 발현하신 최초의 장소는 스페인 사라고사(Zaragoza)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스페인으로 전도여행을 떠난 야고보 사도는 전도성과가 여의치 않았었죠. 그때 에브로(Ebro) 강가의 기둥(Pilar)에 성모님이 발현하여 야고보 사도에게 그의 전도활동은 수백년 후에 빛을 발할 것이라며 그곳에 성당을 짓도록 했죠. 그곳이 바로 사라고사의 필라르 성모성당입니다. 이때가 서기 40년 1월 2일 밤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동생이자 열두 제자 중의 한 분이었던 요한의 예루살렘 집에 살고 계셨던 성모 마리아께서 살아있는 몸으로 야고보가 전도활동 중이던 스페인에 발현했던 것입니다. 

성모 발현장소에 세워진 사각형의 소성당

 

2. 파티마의 전반적인 모습 스케치

성모 발현 터에 세워진 조그마한 외부 성당에서는 신도들의 끊임없는 기도가 이어졌고, 외부 광장의 하얀 선을 따라 무릎으로 걷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순례자들은 조그마한 사각형의 성당 내부 제대를 따라 한 바퀴 돈 뒤에 자신의 염원을 빌었습니다. 저도 바로 그 제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죠.

먼 거리를 무릎으로 걸어 소성당의 제대까지 오는 순례자들
외부의 트인 소성당 제대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나 자신

이곳에서 기도드리는 사람들의 신앙과 염원은 절실한 것이었으리라! 이곳이 성모님이 직접 발현하신 바로 그 장소이기 때문에 그 의미는 한층 더 깊었을 것입니다. 소성당 바로 곁의 파티마 대성당과 그 반대편의 너른 광장을 가로질러 또 다른 큰 성당에서는 시간대별로 미사가 진행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오신 신부님 두 분을 만나 무릎을 꿇고 사제의 축복기도를 받아드렸죠. 저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저녁 9시 미사를 기다리는 신도들
미사 종료 후 촛불 점등

저녁 9시, 10여명의 사제들이 미사를 집전하면서 촛불을 밝혀 들었죠. 모든 신도들도 촛불을 켰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성모상을 앞세우고 광장을 한 바퀴 선회하며 성모송을 불렀습니다. 다들 손을 모아 촛불을 받쳐들고 간절히 간절히 성모송을 부르며 자신들의 염원이 하늘에 닿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저도 그들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 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한 적도 없었을 겁니다. 

파티마 대성당의 광장을 행진하는 신도들

 

3. 성모님을 목격한 세 꼬마목동이 살았던 마을 알주스뜨렐Aljustrel

루치아(당시 10세), 프란치스코(9세)와 히야친타(7세)는 파티마에서 약 4km 정도 떨어진 알주스뚜렐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현재의 파티마 지역에서 성모님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중 나이가 가장 많았던 루치아는 1929년 수녀가 되어 2005년까지 사시다 돌아가셨죠.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 오누이는 성모님의 예언대로 1919년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물론 그들은 성모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답니다. 

왼쪽부터 루치아, 프란치스코, 히야친타

동남아시아의 오토바이를 개조하여 만든 일명 '뚝뚝이'가 있었습니다. 이 뚝뚝이를 불러세워 알주스뚜렐 마을까지 가자고 했는데 예상 외로 요금이 저렴했습니다. 주변을 관광하면서 잠시 한 눈을 팔자 운전자가 루치아 수녀의 집 앞에 내려 줍니다. 1917년 모습 그대로 였습니다. 단지 도로변만 하얀 회칠을 했을 뿐 안쪽은 돌로 돼 있었습니다.  

루치아 수녀의 생가, 외부
루치아 수녀의 생가, 안쪽 창고

루치아 수녀의 집 내부는 박물관으로 단장되어 있어 과거의 생활도구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고, 외부의 안쪽은 넓은 부지에 공원처럼 조성돼 있었습니다. 1917년 성모발현은 포르투갈 사회에 커다란 파장이었기 때문에 성모님을 목격한 세 꼬마의 집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을 겁니다. 이제 프란치스코 오누이의 집으로 향합니다. 불과 30~4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 오누이의 생가
두 오누이가 독감을 앓았던 침대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 오누이의 집은 박물관은 아니지만 내부를 공개하고 있었고, 자원봉사자가 집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조그마한 방이 있고 생활용구도 있었습니다. 집의 안뜰로 들어가자 이곳도 루치아 수녀의 생가와 마찬가지로 안측 집벽은 그냥 돌로 쌓여 있었고 하얀 회칠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소박한 옛집이었죠.  

성모님 발현지인 파티마와 성모님을 목격한 세 꼬마목동이 살았던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마을은 소박하였고 관광지처럼 북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한적한 시골마을이었을 뿐입니다. 반면, 파티마는 사람이 많아 아주 북적였습니다. 성지순례를 온 사람과 관광객이 뒤섞여 혼잡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지난 2017년이 100주년이었습니다. 벌써 100년이 훌쩍 넘어버렸네요. 이제 저의 다음 행선지는 루르드가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과달루페가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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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티아고 가는 길이란?

산티아고(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순례여정으로 프랑스 국경도시인 생장피드포르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800km에 달하는 거리를 프랑스길(Camino Frances)이라 한다. 이 순례길이 지난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 외의 까미노(camino, 순례길)도 북부길, 은의 길, 포르투갈길 등이 있다.

2018년 10월부터 12월까지 유명 연예인 GOD 멤버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사연이 방송됐고, 2019년에는 모 종편 방송에서  스페인 하숙(albergue, 순례자 숙소)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여 유명세를 더했다. 특히 차승원, 유해진, 배정남 등 유명 방송인이 직접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모습은 산티아고를 걷고 싶어하는 마음에 불을 지폈다.

배낭의 무거움에 내려놓다.

2. 산티아고 순례 준비물과 비용

#까미노 트레킹 준비물

1) 배낭 : 40~50리터의 배낭이 적절하다. 참고로 제 배낭은 45리터였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허리를 제대로 잡아줘야 어깨의 피로감을 덜 수 있는데 여러 개의 브랜드를 사용해 본 결과 OSPREY가 제일 편했다.

2) 신발 : 발가락 끝이 약간 남아도는 비교적 여유있는 등산화가 좋다. 신발이 딱 맞으면 발가락 끝이 굽어지고 불편하다. 그리고 발목이 꺾이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등산화는 발목까지 오는 중등산화가 좋을 듯하다. 

3) 침낭 : 가볍고 보온성이 양호한 것으로 선택하는 것이 좋다. 계절에 따른 보온성을 고려해야 한다.

4) 옷 : 입은 것을 포함하여 속옷 2벌, 상하의 2벌, 양말 2족, 그리고 보온성 외투 1벌이면 충분하다. 저의 경우 배낭 무게를 줄이려고 하루 입은 옷은 그날 오후 세탁하고, 그 다음날 입을 옷을 미리 입고 있다가 잠을 잤다. 그리고 그 다음날 세수만 하고 그대로 출발했다.

5) 판초우의 : 배낭가지 덧씌워야 되므로 반드시 판초우의가 필요하다.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아 필수품이다.

6) 세면도구와 슬리퍼 : 칫솔, 치약, 면도기, 수건, 비누, 화장품은 필수고 슬리퍼도 필수품이다. 슬리퍼는 샤워할 때와 등산화를 벗고 주변을 돌아다닐 때 필요하다.

7) 등산스틱 : 다리의 무게감을 덜어주기 때문에 필요하다. 1쌍으로 사는 것을 권장한다. 참고로 저는 처음에는 스틱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2번째 순례부터는 스틱을 사용했다. 힘이 있다면 스틱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

8) 버물리 파스 및 패치 : 벌레에 잘 물리는 사람은 버물리 파스와 붙이는 소형 패치가 필수품이다. 저 같은 경우 베드버그에 수차례 물렸었는데 그때 패치를 붙이면 전혀 가렵지 않아 최고의 휴대품이었다.

여럿이 돈을 갹출하여 식사를 준비하다.

#순례 비용

어떻게 소비하느냐에 따라 비용은 천차만별입니다. 저는 식사를 대부분 카페테리아에서 순례자메뉴로 주문했기 때문에 저녁 식사 비용만 하루당 10유로가 지출됐습니다만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식사를 직접 조리해서 드시기 때문에 비용이 적게 듭니다.

우선 하룻밤을 묵는 알베르게의 숙박요금은 시립기준으로 5유로이며 여기에 침대 종이시트를 합하면 6유로가 됩니다. 그리고 아침은 전날 저녁에 준비해 뒀던 식사를 하며, 점심은 수퍼에서 산 과일이나 빵으로 대체하며, 저녁은 2~5명이 약 3~4유로 정도를 더치 페이하여 식사를 직접 조리합니다.

그렇다면 하루 체재비용은 6유로+4유로+10유로(Bar에서 커피나 음료) = 20유로 정도가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32일을 걷는다면 20유로 * 32일 = 640유료가 될 겁니다. 한화로 환산해 보면 640유로 * 1,311원(2020.11.17일 기준) = 약 84만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순수하게 걷는 32일(프랑스길 기준, 25km/일) 을 제외한 기간은 주변을 관광하거나 다른 곳을 갈 텐데 버스료, 기차료, 숙박료 등의 비용은 따로 산정하세요.

그럼 마지막으로 항공권은 비성수기 기준으로 직항이 아니라 경유할 경우 왕복 100만원 정도가 될 것입니다. 저는 무조건 직항만 고수했어요. 환승하기 싫어서.

총비용은 32일 기준 숙식비 약 84만원인데 90만원으로 잡고, 그 다음 주변관광 등의 비용을 100만원(예비비 포함)으로 가정하며, 항공료를 비성수기 기준으로 110만원으로 추산한다면 대략 300만원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40일을 타국에서 온전히 지내면서 300만원 밖에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아주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 가는 길을 갑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주올레나 지리산둘레길을 걸어도 그 기간이면 더 많은 돈이 소요된다는 겁니다.

2023년 4월 24일자 수정1) 다른 내용은 동일하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 항공사가 도산을 많이 한 관계로 항공료가 플러스(+)돼야 할 것 같습니다. 항공료만 조금 높여 계산하시면 무방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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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추천도서

글 읽기에 최적인 독서의 계절 11월도 어느 덧 하반기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매년 '책을 읽어야지' 하는 생각만 가득할 뿐 실제로 책을 읽은 적은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한 번 되돌아 볼 것을 권장하고 싶어요. 이 책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중 '프랑스길'과 제일 적게(?) 걷는 '포르투갈 해안길'을 트레킹한 기록입니다.

 

2. 어머니 영혼과의 동행

대학교수와 부총장직을 모두 벗어던져 버리고 홀가분하게 떠난 순례,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모곡을 머릿속에 새기고 또 새기며 길을 걷는 까미노 순례자는 진정 마음의 평화를 찾았을까요?

 

3. 책중 인용문

2018년 봄, 의식조차 가물거리던 어머니께서 병실 천정을 무끄러미 바라보며 간병하던 누나에게 "얘야! 하늘이 너무 아름답구나."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께서 누워계시던 침대 위는 그저 꽉 막힌 천정이었을 뿐인데.... 영안이 열려 당신께서 가실 천국을 미리 보시기라도 한 듯 그로부터 며칠 뒤 세상을 떠났다. 나에게 큰 나무였던 어머니의 빈 자리는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마음속 깊이 남아있는 후회는 바쁘다는 핑계로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었다. 각박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서 내 자리를 확실히 지켜야 했다. 직위에 걸맞는 노력에 열정까지 보태느라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막내아들의 성공을 기원하며 자주 보고 싶어 했던 어머니에게 내 얼굴을 보여주는 것조차 인색하기 짝이 없었으니 불효도 그런 불효가 없었다.

 

4. 전반적 내용과 추천사유

작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효를 다하지 못한 애절함을 어머니의 영정사진과 함께 하는 순례로 대신하고자 2개월 여에 걸친 산티아고 순례에 나선다. 그러나 산티아고 순례길은 순탄한 트레킹 코스가 아니었다. 영적 깨달음을 얻기 위한 마음의 길, 영혼의 길이었다.

그는 걸으면서 사색하고 또 사색하면서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에 대해 생각하고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갖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사색의 결과로 실타래처럼 꼬인 의문을 하나씩 이해해 나간다.

사람들은 산티아고 순례길, 즉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를 걸으면 저절로 영적 깨달음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저자는 길이 아무 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까미노는 사색하고 탐구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도록 유도해 줄 뿐 ,해답은 사색을 통한 자신의 선택이다.'고 말한다.

깊어가는 가을! 단순히 트레킹에 대해 묘사한 책보다는 고뇌와 사색의 흔적이 담긴 효심 지극한 전직 교수의 사모곡을 읽어 보시길 강추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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