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마 대성당 앞을 성모상을 앞세우고 행진하는 신도들

일반적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곳은 비교적 가까운 포르투갈의 파티마 성모 발현지다. 산티아고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간단히 버스를 타고 포르투(Porto)까지 와서, 그곳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파티마(Fatima)까지 간다. 산티아고 버스 터미널에서 물어보면 가는 방법을 상세하게 가르쳐 준다. 산티아고 트레킹을 마치고 2일 정도 여유기간에 방문하면 좋은 곳이라 여기에 소개해 본다. 

 

1. 로마 교황청이 공식 인정한 세계 3대 성모발현지 중 파티마는?

세계 3대 성모발현지는 1531년에 발현했던 멕시코의 과달루페Guadalupe, 그리고 1858년의 프랑스 루르드Lourdes, 마지막으로 1917년 포르투갈의 파티마Fatima였습니다. 1917년 5월 13일 세 목동 앞에 발현하신 성모께서 사람들에게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그해 10월 13일을 지정했죠. 그날 기자들을 포함한 7만여 명의 관중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비바람이 물러가고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땅은 바짝 말랐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태양이 구름을 뚫고 내려와 회전하며 찬란한 색의 향연을 펼쳤으며, 하늘에는 성인들의 모습도 비춰졌습니다. 언론들은 '파티마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호외를 발간하기도 했었습니다.

#최초의 성모 발현은? 

성모 마리아께서 발현하신 최초의 장소는 스페인 사라고사(Zaragoza)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스페인으로 전도여행을 떠난 야고보 사도는 전도성과가 여의치 않았었죠. 그때 에브로(Ebro) 강가의 기둥(Pilar)에 성모님이 발현하여 야고보 사도에게 그의 전도활동은 수백년 후에 빛을 발할 것이라며 그곳에 성당을 짓도록 했죠. 그곳이 바로 사라고사의 필라르 성모성당입니다. 이때가 서기 40년 1월 2일 밤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동생이자 열두 제자 중의 한 분이었던 요한의 예루살렘 집에 살고 계셨던 성모 마리아께서 살아있는 몸으로 야고보가 전도활동 중이던 스페인에 발현했던 것입니다. 

성모 발현장소에 세워진 사각형의 소성당

 

2. 파티마의 전반적인 모습 스케치

성모 발현 터에 세워진 조그마한 외부 성당에서는 신도들의 끊임없는 기도가 이어졌고, 외부 광장의 하얀 선을 따라 무릎으로 걷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순례자들은 조그마한 사각형의 성당 내부 제대를 따라 한 바퀴 돈 뒤에 자신의 염원을 빌었습니다. 저도 바로 그 제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죠.

먼 거리를 무릎으로 걸어 소성당의 제대까지 오는 순례자들
외부의 트인 소성당 제대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나 자신

이곳에서 기도드리는 사람들의 신앙과 염원은 절실한 것이었으리라! 이곳이 성모님이 직접 발현하신 바로 그 장소이기 때문에 그 의미는 한층 더 깊었을 것입니다. 소성당 바로 곁의 파티마 대성당과 그 반대편의 너른 광장을 가로질러 또 다른 큰 성당에서는 시간대별로 미사가 진행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오신 신부님 두 분을 만나 무릎을 꿇고 사제의 축복기도를 받아드렸죠. 저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저녁 9시 미사를 기다리는 신도들
미사 종료 후 촛불 점등

저녁 9시, 10여명의 사제들이 미사를 집전하면서 촛불을 밝혀 들었죠. 모든 신도들도 촛불을 켰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성모상을 앞세우고 광장을 한 바퀴 선회하며 성모송을 불렀습니다. 다들 손을 모아 촛불을 받쳐들고 간절히 간절히 성모송을 부르며 자신들의 염원이 하늘에 닿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저도 그들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 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한 적도 없었을 겁니다. 

파티마 대성당의 광장을 행진하는 신도들

 

3. 성모님을 목격한 세 꼬마목동이 살았던 마을 알주스뜨렐Aljustrel

루치아(당시 10세), 프란치스코(9세)와 히야친타(7세)는 파티마에서 약 4km 정도 떨어진 알주스뚜렐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현재의 파티마 지역에서 성모님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중 나이가 가장 많았던 루치아는 1929년 수녀가 되어 2005년까지 사시다 돌아가셨죠.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 오누이는 성모님의 예언대로 1919년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물론 그들은 성모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답니다. 

왼쪽부터 루치아, 프란치스코, 히야친타

동남아시아의 오토바이를 개조하여 만든 일명 '뚝뚝이'가 있었습니다. 이 뚝뚝이를 불러세워 알주스뚜렐 마을까지 가자고 했는데 예상 외로 요금이 저렴했습니다. 주변을 관광하면서 잠시 한 눈을 팔자 운전자가 루치아 수녀의 집 앞에 내려 줍니다. 1917년 모습 그대로 였습니다. 단지 도로변만 하얀 회칠을 했을 뿐 안쪽은 돌로 돼 있었습니다.  

루치아 수녀의 생가, 외부
루치아 수녀의 생가, 안쪽 창고

루치아 수녀의 집 내부는 박물관으로 단장되어 있어 과거의 생활도구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고, 외부의 안쪽은 넓은 부지에 공원처럼 조성돼 있었습니다. 1917년 성모발현은 포르투갈 사회에 커다란 파장이었기 때문에 성모님을 목격한 세 꼬마의 집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을 겁니다. 이제 프란치스코 오누이의 집으로 향합니다. 불과 30~4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 오누이의 생가
두 오누이가 독감을 앓았던 침대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 오누이의 집은 박물관은 아니지만 내부를 공개하고 있었고, 자원봉사자가 집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조그마한 방이 있고 생활용구도 있었습니다. 집의 안뜰로 들어가자 이곳도 루치아 수녀의 생가와 마찬가지로 안측 집벽은 그냥 돌로 쌓여 있었고 하얀 회칠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소박한 옛집이었죠.  

성모님 발현지인 파티마와 성모님을 목격한 세 꼬마목동이 살았던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마을은 소박하였고 관광지처럼 북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한적한 시골마을이었을 뿐입니다. 반면, 파티마는 사람이 많아 아주 북적였습니다. 성지순례를 온 사람과 관광객이 뒤섞여 혼잡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지난 2017년이 100주년이었습니다. 벌써 100년이 훌쩍 넘어버렸네요. 이제 저의 다음 행선지는 루르드가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과달루페가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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