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6월 17일 프랑스 군함 ‘이제르’호가 뉴욕에 입항했다.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기증한 자유의 여신상이 이 군함에 실려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 조각가 바르톨디가 외부 디자인을 했고, 에펠탑을 건설했던 구스타프 에펠이 내부 프레임에 구리판을 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총길이 46m에 달하는 동상을 미국으로 운송하기 위해서는 수백 개의 상자에 분해된 동판과 프레임을 담아야 했다.
뉴욕의 대표적 랜드마크인 자유의 여신상. 그러나 당시 뉴욕시의 상황은 난감했다. 정작 프랑스의 선물을 받긴 하였지만 동상 재조립 비용은 물론 동상을 설치할 기단 공사비용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상 조각이 담긴 상자들은 항구 귀퉁이에 방치되어 먼지와 바닷바람에 퇴색되어가고 있었다.
미국의 다른 도시들은 자유의 여신상을 자신들에게 보내달라며 뉴욕시에 협상을 제안하기도 했다. 뉴욕시도 다른 도시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곤경에 처하였다.
이때 퓰리처상(賞)으로 유명한 언론인 조셉 퓰리처가 자유의 여신상 설치를 위한 모금활동에 불을 붙였다. 그는 자신의 신문인 『더 월드(The World)』의 지면을 할애해 “프랑스가 보내온 귀중한 선물을 둘 자리마저 없다는 것은 뉴욕시는 물론 미국에 큰 수치가 아닐 수 없다”며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 부호들이 미국의 부호들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모든 프랑스 국민이 모든 미국 국민에게 주는 선물이다”라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모금활동에 동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신문 1면에 실었다. 그 결과 12만 명의 시민들이 10만 달러 이상의 거액을 기부했다. 드디어 리버티 섬에 기단부 공사가 시작되었다.
1886년 350개 조각으로 된 두께 2.5㎜ 얇은 구리판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구릿빛 여신은 바닷바람에 산화되어 지금의 청록빛이 되었다. 자유의 여신상은 무게 225톤으로, 높이는 기단부 47.5m와 동상 46m를 합해 총 93.5m에 달하니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는 미국의 상징물로 우뚝 서 있다.
과거 항해 도중 10%정도가 숨지는 고난의 여정을 거쳐 뉴욕항에 도착한 이민자들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거대한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그래서 ‘이민자의 어머니’로 상징 지워졌다. 여신은 오른손에 횃불을, 왼손에는 미국 독립일인 ‘1776년 7월 4일’이라는 명판을 들고 있다.
여신이 딛고 선 기단부에는 ‘너희 지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자유롭게 숨쉬기를 갈망하는 무리들을, 혼잡한 해안에 지쳐 쓰러진 가엾은 족속들을, 머물 곳 없이 폭풍에 시달린 이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나는 황금빛 문 옆에 서서 횃불을 놀이 들리라’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인 거대한 온타리오 호수의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세인트로렌스 강 위에 보석처럼 펼쳐져 있는 1864개의 섬이 펼쳐진다.
프랑스의 탐험가는 하늘과 수면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푸르른 환상의 강에 점점이 떠있는 천여 개의 섬들을 보고 천섬이라 이름 짓는다.
각양각색의 고급 별장들이 조그마한 섬마다 가득 들어서 있어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세인트로렌스 강은 미국과 캐나다를 가로지른다. 그래서 섬마다 게양된 국기가 미국 영토인지 캐나다 영토인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넓고 끝없는 강을 따라 부드럽고 하얀 모래가 반짝이는 백사장과 푸른 초록이 인상적인 침엽수, 울긋불긋 전형적인 가을 색깔이 느낌을 더해주는 메이플 단풍이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감흥을 일깨운다.
하트섬
아기자기 아름다운 섬들 중에 백만장자 호텔지배인 조지 볼트가 건축했다는 하트섬의 볼트성(Bolt Castle)이 나의 마음을 감동으로 몰고 간다. 섬의 중앙에 뾰족한 지붕이 얹어진 건물이 바로 그 유명한 볼트성이다.
볼트는 사랑하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이벤트를 준비한다. 그는 이곳 섬을 사들여 하트(♡) 모양으로 깎아냈다. 그리고 가장 좋은 호텔을 짓기 시작했다. 병약한 아내가 마치 공주처럼 이곳에서 편안히 지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녹음이 우거진 무성한 나무들과 어우러진 환상적인 건물, 그리고 하트섬을 감싸 안고 흐르는 세인트로렌스 강의 푸른 물줄기가 동화 속의 풍광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 루이스는 섬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1904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볼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공사를 중단하고 워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디즈니랜드의 아름다운 성과 유사한 볼트성은 동화 신데렐라 같은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간직한 채 아직도 미완의 사랑으로 남아있다.
하트섬 선착장
하트섬의 한 때 주인이었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초대 지배인 '조지 볼트(George Bolt)'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보자.
폭풍우가 도심을 휩쓸던 1891년의 어느 날 새벽 1시, 호텔 객실을 구하지 못한 한 노부부가 차를 몰아 작고 허름한 호텔에 당도했다. 초라한 행색의 노부부는 말했다. “예약을 못했는데 빈 객실이 있습니까?” 당시 필라델피아에는 행사가 있는 관계로 호텔의 객실이 꽉 차 있어서 빈방이 전혀 없었다.
허름한 호텔 종업원은 전화를 걸어 백방으로 호텔의 빈방을 수소문해 봤지만 허사였다. 노부부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길거리에서 잠을 청할 수도 없어 난감해 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 그때 종업원이 노부부에게 다가와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 호텔에는 빈 객실이 없습니다. 다른 호텔도 알아봤지만 역시 빈방이 없답니다. 지금 밤도 늦었고 밖은 비바람이 치고 있으니 누추하지만 제 방에서 주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종업원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노부부는 감사의 표시로 종업원에게 객실요금의 3배를 건넸다. 그러자 종업원은 자신의 방은 객실이 아니므로 방값을 받을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로부터 2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여전히 낡아빠진 필라델피아의 호텔에서 성실히 일하고 있던 그 종업원에게 한 통의 우편물이 배달되었다. 2년 전 자신의 방에 묵었던 노부부가 보낸 초대장과 뉴욕행 항공권이었다. 휴가를 내고 뉴욕으로 달려간 그를 노부부는 반갑게 맞이했다. 노부부는 방금 단장을 마친 최고급 호텔 앞으로 그를 데려가 말했다.
“당신을 위해 이 호텔을 준비했소. 이 호텔의 총지배인이 돼 주시오.”
호텔 이름은 ‘월도프 아스토리아’였다. 이 호텔의 역사는 18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유한 명문가문 아스터가(家)의 두 형제인 월도프와 윌리엄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윌리엄이 가업을 상속하게 되자 형인 월도프는 동생의 대저택 근처에 13층짜리 월도프 호텔을 건축했다. 그러자 동생은 4년 뒤 월도프 호텔 건너편에 16층짜리 아스토리아 호텔을 세운다.
수년간 경쟁을 벌이던 두 형제는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전문경영인을 두기로 합의했다. 그때 임명된 사람이 바로 지방의 허름한 호텔 종업원 출신인 조지 볼트(George Boldt)였다. 초라한 지방호텔의 일개 종업원이 뉴욕의 왕궁이라는 별칭을 가진 세계 최대 규모의 월도프 아스토리아(Waldorf Astoria) 호텔의 초대 경영자가 된 것이다.
그는 노신사의 기대에 걸맞게 세계 굴지의 호텔 체인을 이룩하는 대업을 달성했다. 1893년 총지배인이 된 조지 볼트는 1916년 그가 죽을 때까지 이 호텔에서 일했다.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인성과 조그마한 친절이 행복을 가져다준 대표적 사례다.
- 진종구의 『행복도 제 하기 나름』 글 중에서 -
필라델피아의 조그만 호텔 종업원이던 조지 볼트는 일약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총지배인이 된다. 그리고 자신을 인정해준 노신사의 딸 루이스와 결혼하였다. 그녀를 위한 성(castle)을 짓다 그녀가 죽자 돌연 공사를 중단하고 다시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12년 동안 그녀를 생각하며 그곳에서 지냈다. 조지 볼트를 영입했던 아스터 가문, 그 아스터가(家)의 아스터 4세가 타이타닉호에서 어린 신부를 구하고 자신은 차디찬 바닷물 속에서 운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파리 세느 강을 중심으로 한 쪽에는 루브르 박물관이, 다른 한 쪽에는 오르셰 미술관이 자리잡고 있다. 오르셰(d'Orsay) 미술관은 '발상의 전환'의 대명사로 꼽힙니다. 한때 철도역으로 위용을 자랑했으나 전철의 발달로 기차역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되자 1939년 폐쇄되기에 이르렀죠.
오르세 미술관 내부
그 후 이 철도역은 도심지의 흉물로 남게 되어 우범지역화 되기에 이르렀답니다. 그러나 골칫덩이였던 철도역이 발상의 전환으로 드디어 1979년 개조공사를 시작하여 1986년에 미술관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철도역의 외관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내부에 전시실을 설치한 발상의 전환이었죠. 이곳에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많이 전시돼 있습니다.
내부의 양측 룸에 미술작품이 전시돼 있다.
이곳은 3층으로 구성돼 있으며, 3층에는 카페테리아Cafeteria도 있어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세느 강을 바라보는 여유도 즐길 수 있습니다. 한때 흉물로 방치되었던 철도역사가 새로운 명물로 거듭난 전형적인 건물입니다.
헤라클레스의 활 쏘는 동상
3층의 한 켠에 설치된 헤라클레스의 활 쏘는 동상이 남성성의 상징으로 전시돼 있어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합니다.
오르세 미술관이 '발상의 전환'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도시의 흉물을 무작정 철거하여 개발하지 않고, 과거의 유물을 그대로 보전하면서 내부만 개조하여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게 만든 대표적 상징물이기 때문입니다.
베네룩스 3국! 원래 스페인령이었으나 1648년 네덜란드가 독립한 것을 계기로 1830년 벨기에, 1867년 룩셈부르크가 각각 분리 독립하면서 이들 나라의 이니셜을 따서 베네룩스 3국이라 칭하게 된다. 이들 나라는 베네룩스 3국 연합을 결성하여 후에 유럽연합의 토대가 되었다.
높디높은 룩셈부르크 충혼탑
룩셈부르크 수도인 룩셈부르크市 초입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서 있는 충혼탑이 인상적이다. 승리의 여신이 나라를 위해 순국한 선열들의 머리에 월계관을 씌워 주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한국전 참전 사실도 표기돼 있다.
충혼탑 아래에는 글씨도 선명하게 6.25한국전에 참전한 용사들을 기리는 내용이 있다. 6.25전쟁 발발 다음 해인 1951년부터 전쟁이 종료된 다음 해인 1954년까지 파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노트르담 대성당
후기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17세기에 건축된 노트르담 주교좌 성당의 지붕이 독특하다. 지붕의 색깔이 곧 룩셈부르크의 색이라나~? 어찌됐든 지붕색과 하늘색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보기에 좋았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현 국가원수인 앙리 大公의 부친이던 장 大公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열렸다. 성당 내부가 어둑해 지지 않도록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외부로부터 빛을 받아 들이고 있다.
룩셈부르크의 어느 광장전원적인 시가지 풍경
헌법광장이었던가? 하는 곳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저 멀리 왕궁처럼 생긴 아름다운 풍경이 보인다. 그 풍경을 촬영하고 돌아서려는데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깊은 계곡과 교량이 시내를 관통하고 있다.
수리 중인 아돌프 다리
구 시가지와 신 시가지를 구분해 주는 페트루세Paitruss 계곡 사이로 아르제트 강이 흐르고 있고, 그 위로 높이 46m, 길이 84m에 이르는 아돌프 다리가 지나가고 있어, 사람들에게 웅장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계곡의 높이가 높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보여 주고 싶어 위의 사진을 촬영했다. 올려다 보는 것만으로도 고개가 아플 지경이다. 사진으로는 웅장함이 느껴지지 않지만 실제로 그곳을 방문해 보명 계곡의 깊이가 깊다는 것을 실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