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모든 동물의 쓸개는 쓰다. 그 중에서도 곰의 쓸개 웅담(熊膽)은 더욱 쓰다. 그런데 웅담보다 쓴 것은 무엇일까? 곰의 쓸개가 이 정도로 쓸 진데 하물며 용의 쓸개(龍膽)는 얼마나 쓸까? 이러한 상상이 용담을 탄생시켰다. 야생초 중 뿌리가 아주 쓴 식물에 용담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화려한 보라색의 용담 꽃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런데 용담보다 약 10배 정도 더 쓴 식물이 나타났다. 용의 쓸개까지 이미 다 이름을 붙였는데 이젠 어떤 동물의 쓸개를 붙여야 할까? 사람들은 용 이상의 동물을 찾지 못했다. 용 자체도 상상속의 동물인데 그 보다 더 영물인 동물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용담과(科)의 이 식물을 그냥 쓴풀이라 부르기로 했다.
색깔이 자주색이니 자주쓴풀이다. 자주쓴풀의 뿌리를 씹어보면 너무 써서 전혀 쓴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다. 미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쓴맛에 진저리를 치게 된다.
단풍이 점차 타오르기 시작할 즈음 뒷산 양지 녘에 자주쓴풀의 살랑거림이 노래가 되었다. 말 못할 설움이 다섯 장의 꽃잎으로 스며들어 보랏빛 눈물이 핏줄처럼 흐른다. 쓰디 쓴 설움에 보랏빛으로 변해버린 눈물자국은 한(恨)이 되어 우리의 지각(知覺)을 일깨운다. 그래서 꽃말이 ‘지각’이다.
꽃이 달린 자주쓴풀을 뿌리째 뽑아 응달에 말린 것을 당약(當藥)이라고 한다. 민간요법에서는 위통, 위염, 소화불량 등에 사용한다. 또한 성질이 차가워 청열해독(淸熱解毒)이라 하여 열을 내려주고 해독작용을 원활하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머리털을 빨리 자라게 하는 효과가 있어 조기탈모증에 사용된다. 북한에서 발간했다는 ‘약초의 성분과 이용’에서는 임상실험결과 76%의 발모효과를 봤다고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약품이 없어 풀뿌리로 약을 대신하기 때문에 야생초의 약효를 연구하는가 보다.
자주색 쓴풀이라 자주쓴풀
자주쓴풀을 소주에 담가 1개월에서 3개월이 경과한 후 한 잔씩 마시면 위염 등에 좋다고 하는데 술을 싫어하는 사람은…??? 탈모증에는 자주쓴풀을 달여 머리에 마사지하면 발모효과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어떤 발모제에는 이 성분이 들어가 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옛날 옛적, 기원전 170년경 라디스라스 왕국의 왕은 백성들이 페스트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마음 아파했다. 어느 날 왕은 활을 들고 초원에 나가 가엾은 백성들을 구원할 약초를 찾아 줄 것을 신들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그는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화살은 멀리 날아가 땅에 떨어져 한 식물의 뿌리를 관통했다. 그 식물은 용담이었다. 왕은 그 식물 뿌리를 이용하여 백성들의 병을 치료했다. 그때부터 헝가리에서는 이 식물을 가리켜 성(聖)라디스라스 약초라 불렀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헝가리의 전설이다.
역사가 천년이 흐르면서 갖가지 말들이 덧붙여져 전설이나 신화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라디스라스 왕국의 전설을 역사로 되짚어 보기로 했다. 용담의 학명은 겐티아나 스카브라(Gentiana Scabra)이다. 속명(屬名)인 겐티아나는 발견자 겐티우스(Gentius)에서 비롯되었으며, 종명(種名) 스카브라는 잎 표면이 거칠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발견자 겐티우스는 누구인가?
기원전(BC) 168년 로마는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일리리아(Illyrian)왕국과 충돌하였다. 무적의 로마군은 일리리아군을 격파하고 겐티우스 왕을 포로로 잡았다. 로마는 그곳에 일리리쿰(Illyricum)이라는 속주를 세웠다. 일리리쿰은 구(舊)유고슬라비아의 서부, 즉 현재의 헝가리에 인접한 크로아티아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니 헝가리 전설이 탄생할만한 지역이다. 또한 당시 헝가리 종족과 그곳을 정복한 로마인들 사이에 언어 또는 지명 호칭의 차이로 인해 라틴어로 기록된 일리리아 왕국을 헝가리에서는 라디스라스 왕국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어찌됐든 용담의 발견자는 이 지역의 왕이었던 겐티우스였고, 식물분류학에서 사용하는 학명에서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보라색 꽃을 피우는 용담
짙푸른 가을 하늘빛으로 피어나 신비롭고 단정한 모양새를 자랑하는 용담은 가엾은 백성을 사랑하는 한 왕의 애절한 마음이 묻어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꽃말이 ‘당신이 슬플 때 사랑한다’인가보다. 또 다른 꽃말은 애수와 정의다. 꽃말은 나라마다 지역별 특성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니 꽃말을 한 가지만 고수해서는 안 된다.
용담은 쓰다. 쓴맛을 내는 겐티오피크린은 미각신경을 자극하여 위액의 분비를 촉진시키거나 감축시켜 줘 위와 장의 활동력을 증강시킨다. 그러니 만성 위산과다증이나 저위산증에 효과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겐타오닌 성분도 염증을 없애는 동시에 진통작용을 하고 있어 염증, 류머티스 관절염, 수족마비, 암 등에도 사용되고 있다. 용담뿌리를 달인 물은 항암효소가 있어 위암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약효 탓에 우리나라에도 전설이 하나 있다.병든 어머님을 모시고 가난하게 살고 있던 한 촌부가 사냥꾼에 쫓기던 토끼를 구해 주었다. 물론 그는 이전에도 산에 살고 있는 많은 동물들을 보살펴 주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촌부가 눈 쌓인 언덕을 지나고 있는데 웬 토끼가 눈을 헤집고 풀뿌리를 핥고 있는 것이 아닌가. 촌부가 자세히 살펴보니 그 토끼는 일전에 자신이 구해준 토끼였다. 촌부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토끼가 핥고 있던 뿌리를 캐내 한 번 핥아보았다. 그러자 어찌나 쓰던지 촌부는 기절할 정도였다. 화가 난 촌부는 토끼에게 화풀이를 하려 했다. 이때 토끼가 산신령으로 변했다. 산신령은 동물들을 사랑하는 촌부의 마음이 갸륵하여 자신이 토끼로 변한 것이라며 쓰디 쓴 뿌리의 약효를 설명해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결국 촌부는 용담뿌리로 어머님의 병(아마도 위장병?)을 고쳤으며, 그 뿌리를 팔아 가난에서도 해방되었다고 한다.
추위가 찾아올 즈음인 11월 마지막 날 시냇가 주변 질펀한 땅에 길쭉이 솟아난 푸르른 갈대가 바람에 고개를 숙여 겸손히 인사한다. 갈대 잎을 스치는 바람결은 날카롭고 은은한 떨림의 소리를 가득 담아 귓전을 맴돈다. 갈대끼리 부딪치는 마찰음이 하모니를 이뤄 허공을 떠다닌다.
“쉬~이~이.” 이 소리 무슨 소리던가! 시링크스의 애처로운 울부짖음이 여기까지 도달했나? 전원의 목양신 판(Pan)에 쫓겨 갈대가 돼 버린 시링크스(Syrinx)의 가엾은 공명음도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지만, 일명 마이다스의 손 또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로 유명한 미다스(Midas) 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다스의 부왕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으로 잘 알려진 고르디우스였다.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는 스승 세일레노스가 실종되자 그를 찾아 헤맸다. 그런데 정확히 11일 후에 스승이 유쾌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디오니소스는 스승에게 실종됐던 사유를 물었다. 세일레노스는 술에 취해 길을 잃고 헤메던 중 농부들에게 붙잡혀 미다스(Midas)의 왕궁에 까지 끌려갔던 사실을 얘기했다. 그러나 미다스 왕은 자신에게 열흘 동안 연회(宴會)를 베풀어 주며 환대했다고 말했다.
젊은 디오니소스, by 카라바지오
디오니소스는 만취되어 헤매던 자신의 스승을 극진히 대접해 준 미다스 왕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는 미다스 왕에게 어떤 소원이든 한 가지를 들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미다스는 자신이 만지는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말했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의 소원이 현명하지 못하다며 미간을 찌푸렸지만 한 번 약속한 것을 뒤집을 수 없었다.
미다스는 왕궁 주변의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보았다. 나뭇가지는 즉시 황금으로 변했다. 다시 조약돌을 주워들었다. 결과는 역시 황금 돌로 변한 것이었다. 왕궁으로 들어온 그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닥치는 대로 왕궁의 이것저것을 만지며 쏘다녔다. 왕궁이 황금궁전으로 바뀌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배가 고팠다. 그는 부하들에게 음식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산해진미가 그 앞에 차려졌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음식을 하나도 먹을 수 없었다. 그가 음식을 집는 족족 금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미다스는 목을 축여줄 와인을 한 잔 따라 마셨다. 그러나 입으로 들어가던 액체가 단단한 금으로 변해버려 목이 뻣뻣해 져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디오니소스를 찾아가 다시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황금을 향한 탐욕(貪慾)이 결국 화(禍)를 자초한 꼴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이다스의 손’이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의 초췌한 몰골과 그의 간절한 염원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지 예전의 미다스로 돌려놓기로 했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에게 팍트롤로스 강의 원천까지 거슬러 올라가 손을 씻도록 했다. 그리고 머리와 몸을 담그고 죄를 씻어내도록 했다, 마치 기독교의 세례(洗禮)나 침례(浸禮)의식처럼.
미다스의 황금을 만드는 능력이 강물로 옮겨갔다. 팍트롤로스 강은 현재의 터키 지역인 소아시아 중부지역에 있는 강이다. 이 강에서는 지금도 사금(砂金)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그 후에서야 미다스는 생명을 지탱해 줄 황금보다 더 귀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일을 겪은 프리기아의 왕 미다스는 갈대가 많은 전원마을에 칩거하며 시골풍의 목양신 판(Pan)을 숭배하며 지냈다. 판은 갈대를 이용하여 목동들이 부는 피리(Pan-pipe)를 만들었던 신이었다. 미다스가 섬기던 판(Pan)의 이름은 마르시아스였다. 파리스의 황금사과에서 보듯이 아름다움을 겨뤘던 여신들은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였다.
어느 날 아테나 여신은 피리를 하나 만들어 불어보았는데 그 소리가 기묘하고 신비로웠다. 아테나 여신은 헤라와 아프로디테 앞에서 피리를 불었다. 그런데 헤라와 아프로디테가 웃음을 참기 위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었다. 까닭을 모르던 아테나는 거울 앞에서 피리를 불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피리를 불기위해 입 안에 바람을 모으자 양측 볼이 빨개지며 마치 개구리 볼과 같이 부풀어 올랐다. 자신의 아름다움이 피리에 의해 농락당한 것이다. 아테나는 피리를 인간세상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누구든 그 피리를 부는 자는 큰 액운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다.
땅에 떨어진 아테나 여신의 피리를 주운 자가 바로 판(Pan) 마르시아스였다. 마르시아스는 피리를 불며 소일했다. 아테나 여신의 피리를 불어보다 그 소리에 도취돼 버린 마르시아스는 태양의 신이자 수금의 신 아폴론과 실력을 겨뤄보고자 했다. 아폴론은 올림포스 신보다 훨씬 하급 신에 불과한 마르시아스의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판은 올림포스 신과 겨루는 자들이 패배했을 경우 반드시 보복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아폴론과 마르시아스의 음악대결에 그 지역 산(山)의 신 토몰로스가 심판을 맡게 되었다. 판은 갈대피리를 불며 솜씨를 뽐냈다. 판을 숭배하던 미다스 왕은 피리소리에 감명을 받았다. 이제는 아폴론 차례였다. 아폴론은 자신의 악기인 수금을 들어 현을 뜯었다. 아폴론의 손가락이 수금의 현을 튕기자 아름답고 신비로운 곡조가 산으로 메아리쳤다. 산의 신 토몰로스는 더 들어 볼 것도 없이 아폴론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미다스는 자신이 숭배하는 판의 피리소리가 더 좋았다며 토몰로스의 판정에 불만을 표시했다. 아폴론은 음악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인간의 귀를 그냥 놔둘 수 없다며 미다스의 귀를 잡아 당겼다. 미다스의 귀는 길쭉하게 늘어나 털이 솟아올랐다. 미다스는 창피한 마음에 귀를 숨기고 다녔다. 그러나 머리를 손질하는 이발사만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다스는 자신의 전용 이발사에게 절대 비밀을 엄수하라고 명령하고, 만약 이 사실을 발설할 경우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예나 지금이나 영원히 숨겨지는 비밀은 없는 것 같다. 이발사는 왕의 비밀을 말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그러다 어느 날 무성한 갈대밭에 구덩이를 파고 “미다스 왕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목청껏 소리쳤다. 그 후 바람이 갈대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이파리가 부딪치며 마치 이발사가 외쳤던 소리처럼 들렸다고 한다.
다른 설(說)로는 남편의 머리를 손질해 주던 왕비가 남편의 비밀을 갈대밭에서 소리쳤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아폴론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마르시아스는 어찌됐을까? 아폴론은 하급 신에 불과한 마르시아스가 올림포스 신에게 도전한 책임을 물어 산 채로 껍질을 벗겨 버렸다.
우리나라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신라 경문왕이 당나귀 귀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갈대밭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경문왕의 비밀을 소리친 것도 미다스 왕의 사례와 동일하다. 삼국유사는 불교적 색채가 강한 설화다. 경문왕의 귀가 정말 당나귀 귀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아마도 정적들이 경문왕을 흠집내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리라. 아니면 귀가 다른 사람보다 좀 더 길쭉했거나.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Polis)들과 우리나라는 너무도 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는데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산들바람이 갈대밭을 스쳐 지나간다. 시링크스의 서글픈 하소연과 미다스의 비밀이 들리는 지 가만히 귀 기울여 본다. 갈대의 꽃말은 ‘신의, 믿음, 지혜’다. 갈대의 어린 순은 죽순처럼 식용으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한방에서는 소염, 이뇨, 해열, 해독, 숙취해소 등에 사용한다.
불과 수십 년 전만해도 물레를 돌려 실을 뽑고, 그 실로 베를 짰다. 1960년대 시골 마을에는 물레와 베틀이 많았다.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새끼를 꼬는 기계와 가마니를 짜는 틀도 농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요즘은 아마 농촌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까?
7월 어느 날 잔뜩 흐린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비가 그치자 빗물에 축축이 젖은 물레나물이 화려함을 접고 꽃잎을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실을 뽑는 물레가 돌아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해서 물레나물이라 부르는 여름 꽃을 대하고 보니 그리스 신화에서 실을 뽑아 베를 짜던 여인 아라크네가 떠오른다.
아라크네는 베 짜는 기술이 뛰어났다. 그녀의 베 짜는 모습을 보기위해 숲과 물의 요정들까지 찾아와 구경할 정도였다. 아라크네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아테나 여신보다 더 좋은 베를 짤 수 있다고 떠들었다. 아테나(Athena, 로/미네르바Minerva) 여신은 지혜의 전쟁신인 동시에 베 짜는 아낙네들의 수호여신이기도 했다.
아라크네와 아테나 여신, 베짜는 여인들, by 디에고 벨라스케스
어느 날 아테나 여신은 노파로 변장하고 아라크네를 찾았다. 그리고는 인간이 신을 경시하는 태도는 좋지 못하다며 충고를 하였다. 그러나 아라크네는 자만과 어리석음으로 경솔한 말을 하였다. 아테나 여신쯤은 두렵지 않다며 언제든지 겨루기를 해도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아테나 여신은 아라크네의 오만방자한 태도에 즉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아라크네의 베 짜는 모습을 지켜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던 모든 요정들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고개를 숙여 아테나 여신을 경배했다. 요정들의 경배에도 불구하고 아라크네는 자신의 솜씨를 과신한 나머지 아테나 여신을 경배할 마지막 기회를 외면했다.
드디어 시합이 시작되었다. 두 여인은 물레로 실을 뽑아 베틀로 천을 만들기 시작했다. 속도에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무늬가 각자 달랐다. 아테나 여신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도시국가 아테네의 수호신 자리를 두고 경합했던 그림을 그렸다. 아테나는 자신이 강력한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의 경합에서 승리했던 사실을 강조하였다. 여신은 이쯤에서 아라크네가 경기를 포기하고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기 원했다.
포세이돈과 아테나의 싸움
그러나 아라크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들을 경멸하는 그림을 무늬로 새겨 넣기 시작했다. 신들의 제왕 제우스가 백조로 변해 레다를 안고 있는 모습과 황금비로 변해 다나에를 범하는 장면 등을 묘사했다. 아라크네는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의 망나니 같은 행동을 무늬로 새겨 넣어 모든 신들에 대한 경멸적 태도를 보인 것이다.
최종적으로 아테나 여신이 승리했다. 아라크네의 천은 아테나 여신도 흠잡을 데가 없을 만큼 훌륭했다. 그러나 아테나 여신은 아라크네가 천에 새긴 무늬가 신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것에 분노했다. 아테나는 아라크네의 천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아라크네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라크네는 아테나 여신을 이기지 못했다는 한(恨)과 굴욕감으로 베틀에 목을 매었다.
아테나 여신은 물레에서 뽑은 실로 목을 매 사지가 축 늘어진 여인을 다시 태어나도록 명했다. 죽었던 아라크네의 몸이 움직이면서 점차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냈듯 몸을 허공에 던져 꽁지에서 실을 뽑아내는 거미로 변한 것이다. 실을 뽑아내기 위해 빙빙 돌리는 물레, 그 물레처럼 생긴 들꽃을 봤으니 어찌 아라크네가 생각나지 않겠는가.
물레나물
베 짜는 솜씨가 서로 막상막하였지만 아테나 여신이 간발의 차로 아라크네를 이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아테나가 포세이돈과 아테네 시(市)의 수호신 자리를 놓고 경합할 당시 제우스는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선물한 사람에게 아테네의 수호신 자격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때 포세이돈은 말을 선물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말이 힘껏 땅을 파자 샘물이 솟아났고 이 샘물을 인간에게 선물했다고도 한다. 이에 반해 아테나 여신은 올리브 나무를 선물로 줬다. 아테나 시민들은 말과 올리브 나무를 비교한 결과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올리브 나무가 말보다 더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포세이돈의 말, by 월터 크레인
말이 팠다는 샘물과 올리브 나무에 대한 이설(異說)도 살펴보자. 바다의 신이 판 샘물이니 만큼 염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지리적 특성상 아테나 시의 샘물은 석회 성분을 포함하고 있어 순수한 샘물과는 달랐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에게 열매와 오일 등 갖가지 생활편의를 제공해 주는 올리브 나무가 더 유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테나 여신은 아라크네와 베 짜기 경주를 할 당시 이러한 내용을 무늬로 새겨 넣으면서 올리브 이파리 사이에 나비를 한 마리 새겨 넣었다. 그 나비는 이파리 사이를 오가며 날개를 나풀거렸으며 더듬이와 다리에는 솜털이 보송보송하여 진짜 살아있는 나비와 다를 바 없었다. 결정적으로 이 나비를 보고 아라크네는 아테나 여신의 솜씨에 압도당해 스스로 승리를 아테나 여신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아라크네에 대한 이야기는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의 자만과 어리석음을 설명하고 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Babel 塔)도 인간들의 오만방자함이 신들의 영역에 까지 침범하고 싶어 했던 열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늘에 닿는 탑을 쌓고자 했던 노아(Noah)의 후손들은 하느님의 단죄로 각자 언어가 달라져 결국 탑을 완성하지 못했다.
물레나물
성경이나 신화는 신들의 영역까지 도전하고자 했던 인간들의 어리석은 자만을 지적하고 있다. 단순한 그리스 신화 얘기지만 이런 곳에서 교훈을 찾아 매사에 겸손한 마음을 갖는다면 오늘 말하고자하는 들꽃과 신화 이야기는 충분히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나물이라는 단어가 붙은 식물은 우리가 먹을 수 있을 때 사용한다. 물레나물도 어린 순을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 깨끗한 물에 행군 다음 양념과 함께 버무리면 입맛을 돋우는 맛깔스런 반찬이 된다. 꽃말은 ‘임을 향한 일편단심’과 ‘추억’이다. 한방에서는 뿌리를 간 기능 이상이나 지혈 등에 처방한다. 종기가 났을 때 물레나물의 식물체를 찧어 환부에 바르기도 한다.
초여름, 쾌적한 산길을 따라 걷노라니 녹음방초와 새소리에 선계(仙界)에 들어 선 듯 상쾌하다. 산책로 옆으로 활엽수 밑동에 조그만 영지버섯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세상을 구경하고 있다. 짙은 황색과 연한 노랑으로 위아래가 대비되는 버섯 자체가 한 송이 꽃이나 다름없다. 자연의 멋진 품에서 볼 수 있는 귀중한 선물이다. 영지버섯은 활엽수 뿌리나 밑동, 그루터기 등에 자생한다. 한방에서는 영지버섯을 불로초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숲에 취하다보니 그야말로 늙지 않고 장수할 것만 같다. 젊음이여 내게로 오라!
영지버섯은 신경쇠약, 심장병, 고혈압 등 각종 성인병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한약재로 사용하는 이외에도 특이한 형상 탓에 장식용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자연산 영지버섯은 보통 폭이 5㎝에서 15㎝이며 두께는 1.5㎝ 정도로 자란다.
영지버섯을 한약처럼 달이면 너무 써서 마시기 어려우니 티백 차(茶)처럼 3탕까지 우려 마시면 된다. 우선 버섯을 잘게 썰어 삼베와 같은 천에 싸서 끓는 물에 5분 정도 담갔다가 물만 마시면 되고, 재탕도 역시 5분 정도 담갔다 마시며, 삼탕은 10분 정도 담근 후 마시면 된다. 부작용이나 독성이 없어 먹는 방법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단지 쓴 맛을 제거하기 위해 꿀이나 대추를 넣어 물을 끓여 이용하면 그만이다.
불로초라고도 부르는 영지버섯을 다려낸 차(茶)는 아마도 영생불사의 음료이던 넥타르(Nectar)와 다를 바 없으리라. 올림포스 신들의 잔치에 빼놓을 수 없는 음료가 바로 넥타르였다. 신들은 잔치에서 넥타르를 마시고 신들의 음식인 암브로시아(Ambrosia)를 먹음으로 인해 영원한 젊음을 누렸다. 영지버섯 다린 물이 꼭 넥타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마음이 중요하지 않은가. 몸에 좋은 영지차(茶)를 마시고 마음의 평안과 위안을 얻는다면 그 물이 곧 넥타르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초롱꽃은 조선시대 길을 밝혀주는 초롱불의 모습과 닮았다 해서 초롱꽃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초롱불은 흰색의 초롱불과 새색시들 시집갈 때 쓰던 청사초롱과 홍사초롱이 있었다. 우리 산하에 피고 지는 초롱꽃도 이와 다를 바 없다. 그냥 초롱은 하얀색, 금강초롱은 연한 청색, 섬초롱은 연한 분홍색이다. 그러니 초롱불과 초롱꽃은 완전한 쌍을 이룬다. 특히 1965년 발견된 금강초롱은 한국 특산식물로 강원도 북부 산간지방에서 잘 자란다.
한편, 유럽에도 캄파뉼라(Campanula)라 불리는 초롱꽃이 있다. 캄파뉼라라는 단어는 반점이 있는 작은 종(鐘)을 의미한다. 그러고 보니 초롱꽃의 외양이 종과 흡사하다. 초롱꽃과(科)의 학명에는 캄파뉼라가 포함된다. 초롱꽃의 꽃말은 ‘정의’, ‘충실’, ‘소원’, ‘감사’이며, 금강초롱은 ‘각시와 신랑’, ‘가련한 마음’, ‘청사초롱’이다.
분홍색을 띄고 있는 섬초롱
2.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초롱꽃
티탄신 아틀라스(Atlas)는 헤스페로스(샛별)와의 사이에서 3명의 딸을 낳았다. 그녀들은 저녁의 아가씨들이라는 의미로 헤스페리데스(Hesperides)라 불려졌다. 헤스페리데스는 헤라 여신의 명으로 세상 서쪽 끝에 있는 축복받은 정원을 돌보는 임무를 맡았다. 그녀들이 축복받은 정원 '헤스페리데스'를 돌보게 된 이유를 알아보자.
헤라는 뻐꾸기로 변한 제우스가 빗속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을 가엾이 여겨 품에 안았다가 하마터면 제우스에게 겁탈 당할 뻔했었다. 헤라는 제우스에게 자신을 정실부인으로 맞아 신성한 결혼의 수호여신으로 삼아주지 않으면 절대로 몸을 허락할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제우스는 그녀의 조건을 수락하고서야 몸을 섞을 수 있었다. 제우스와 헤라는 청사초롱과 홍사초롱을 밝히며 결혼식을 올렸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Gaea)는 결혼선물로 헤라에게 황금사과를 주었다. 제우스와 헤라에게 가이아 여신은 할머니였다. 헤라는 가이아의 결혼선물에 매우 만족하였다.
그녀는 귀한 결혼선물에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도록 세상의 서쪽 끝 정원에 황금사과를 심었다. 황금사과는 썩어 싹이 나고, 성장한 나무는 황금사과를 주렁주렁 매달게 되었다. 헤라는 헤스페리데스 3자매에게 이 귀한 황금사과나무가 있는 정원을 관리하도록 했다. 그 후부터 그곳은 헤스페리데스 정원으로 불리게 된다.
섬초롱
어느 날 헤스페리데스 정원에 있던 나무들이 뽑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헤라는 헤스페리데스 자매들로는 황금 사과나무를 지키는데 충분치 않다고 판단하여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른다. 과거 제우스와 생사의 대결을 벌이던 티폰(Typhon)이 전쟁 중에도 에키드나와 결합하여 키마이라와 라돈 등의 자녀들을 낳았었다.
헤라는 라돈(Ladon)이라는 용을 이 숲의 파수꾼으로 배치하였다. 강력한 화룡이던 라돈이 버티는 한 결코 황금사과를 훔칠 수 없었다. 그런데 신(神)인지 인간(人間)인지 알 수 없는 도둑이 황금사과를 훔치기 위해 헤스페리데스 정원에 숨어드는 사건이 또 다시 발생했다는 것이다.
헤스페리데스 정원과 관련된 그리스 신화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초롱꽃 전설에 등장하는 소녀가 있다. 이 소녀의 이름은 캄파뉼이었다. 캄파뉼은 헤스페리데스 3자매 중 한명의 딸이라는 것이다. 물론 확인된 신화는 아니다. 도둑이 들었을 당시 헤스페리데스 자매들은 잠시 자리를 비웠었고, 화룡 라돈은 졸고 있었던 것 같다.
캄파뉼은 도둑이 정원에 침입하자 라돈을 깨우려고 작은 종을 요란하게 쳐댔다. 다급해진 도둑은 종을 치지 못하도록 캄파뉼을 죽이고 도주해 버렸다. 힘없는 어린 소녀가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캄파뉼은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지만 헤라의 황금사과를 온전하게 지켜냈다.
꽃의 여신 플로라(Flora)는 종을 치다 죽어간 캄파뉼을 측은히 여겨 종의 모습을 한 초롱꽃으로 태어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초롱꽃이 그녀의 이름과 ‘작은 종’이라는 의미가 담긴 캄파뉼라(Campanula)라는 것이다.
3. 초롱꽃 전설
또 다른 초롱꽃에 얽힌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어린 나이에 노쇠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전쟁터에 나가 한쪽 다리를 잃고 평생을 종지기로 살아온 마음 여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종을 쳐 적이 침입했을 때 위급함을 알렸고, 매일 잠자는 시간, 일어나는 시간, 성문을 여닫는 시간에도 종을 쳤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부임한 성주(城主)는 종소리가 시끄럽다며 종을 치지 말도록 명령했다. 이제 그 누구도 종을 칠 수 없었다. 평생 종을 치는데 삶의 의미를 부여해 왔던 그는 서글픈 마음에 마지막 종을 치고는 종루에서 몸을 던졌다. 그 후 종지기가 떨어져 죽은 자리에 종 모양의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초롱꽃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돌고 돈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로, 오늘의 고난이 내일의 환희로, 음지가 양지로, 양지가 음지로, 그렇게 세상만사 돌고 돈다. 나이테도 돌고 돌아 세월의 흐름을 표출한다. 저기 저 풀밭 속의 키 작고 꼿꼿한 타래난초도 작은 방울꽃을 휘감아 빙빙 돈다.
애써 찾아 볼 땐 보이지 않더니 그냥 털썩 주저앉은 바람 부는 언덕배기 한 켠에서 술래 잡듯 보일락 말락 방울꽃을 흔들어 댄다. 아하~! 드디어 찾았다. 아니 나를 찾아왔다.
꽃이 아래로부터 실타래처럼 꼬여 피기 때문에 타래난초라고 부른다. 어렸을 적 꽈배기를 먹던 생각이 절로 나는 꽃이다. 곱고 여린 소녀처럼 순수하게 피어난 꽃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늘을 향해 피어간다. 점차 시들어 가는 아래쪽 꽃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위쪽으로 피어나는 싱싱한 꽃은 순수한 처녀성을 자랑한다. 그래서 꽃말이 ‘추억’과 ‘소녀’다.
타래난초는 잔디나 잡초 사이에서 자라난다. 타래난초의 씨앗은 너무도 작아 발아에 필요한 양분조차 없다. 그래서 잔디 뿌리 등에 서식하는 박테리아와 곰팡이 균을 이용한다. 타래난초의 씨앗은 자신의 몸에 균이 기생하도록 한 다음 그 곰팡이 균의 영양분을 흡수해 버린다.
자칫 잘못하면 균의 침입으로 자신의 몸이 분해돼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항상 이 방법을 이용한다. 목숨을 담보로 한 타래난초의 생존전략이 돋보인다. 타래난초는 씨앗에 의해 번식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키울 때는 포기를 나눠 심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이때 타래난초 곁에 잔디를 조금 심어주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된다.
타래난초는 실타래처럼 비비꼬여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요즘은 실타래를 보기 어렵지만 우리 세대는 매일 실타래를 보며 자랐다. 타래를 다른 말로 바꿔 본다면 매듭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실타래가 꼬여서 커다란 매듭이 되기 때문이다. 타래난초를 보면서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을 생각해 본다.
2. 타래난초와 고르디우스의 매듭
고르디우스는 원래 가난한 농부였다. 현재의 터키 내륙 소아시아에 위치한 프리기아 지방 사람들은 신탁(神託)을 받았었다. 신탁 내용인즉 미래의 왕은 짐마차를 타고 온다는 것이었다. 이때 고르디우스가 짐마차에 아내와 아들을 태우고 광장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고르디우스는 프리기아의 왕으로서 자신의 짐마차를 신에게 바치고 튼튼한 매듭을 만들어 그 짐마차를 기둥에 단단히 묶어놓았다. 이 매듭이 그 유명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다. 그 후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전체 아시아 땅의 왕이 될 것이라는 신탁이 내려졌다. 숱한 사람들이 이 매듭을 풀기위해 도전했으나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생긴 타래난초
기원전(B.C.) 334년경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의 대왕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영/알렉산더Alexander)가 동쪽으로 원정을 가던 중 소아시아의 프리기아 땅에 이르렀다. 알렉산드로스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어보려고 했으나 전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칼을 뽑아 한 칼에 매듭을 베어버렸다.
어찌됐든 실타래처럼 비비 꼬인 매듭이 풀린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도까지 영역을 확대하는 동방원정에 성공하자 사람들은 그때서야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왕이 된다'는 매듭의 의미를 깨달았다.
3.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역사적으로 너무도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해 알아보고 넘어가자.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300㎞ 떨어진 올림포스 산 기슭에 자리 잡은 작은 왕국이었다. 기원전(B.C.) 356년 알렉산드로스 3세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필리포스 2세(Phillippos Ⅱ)는 그리스 도시국가 최초로 직업군인을 창설하여 상비군 체제를 유지했다. 또한 필리포스 2세는 5.5m에 달하는 긴 창으로 이들을 무장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농민들이 군역을 부담했던 관계로 주로 농한기에만 전쟁을 해 왔었다.
아버지가 창설한 상비군 체제를 바탕으로 알렉산드로스는 부왕 필리포스가 살해되자 군인들의 추대를 받아 기원전(B.C.) 336년 마케도니아 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테베가 반란을 일으키자 테베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전 테베시민들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기원전(B.C.) 335년에는 아테네를 점령하여 명실상부한 그리스 문명의 지배자가 되었다. 당시 최대 제국은 다리우스 3세가 통치하던 페르시아였다.
기원전(B.C.) 334년 알렉산드로스 왕은 3만 7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헬레스폰토스(현재의 다르다넬즈) 해협을 건너 동방원정을 단행하였다. 헬레스폰토스 해협은 폭이 4㎞에 불과했지만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경계였다.
현재의 터키 지역인 소아시아(아나톨리아 반도)에 들어 선 알렉산드로스는 그라니쿠스 강에서 페르시아 군과 첫 격전을 치르게 된다.이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로스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남하하여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를 정복하고,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를 향해 전진하였다.
기원전(B.C.) 331년 10월 그리스 군은 티그리스 강 인근 가우가멜라 평원에 진을 치고 있는 25만 명의 페르시아 군과 혈전을 벌여 승리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세폴리스 궁전을 불태워 옛 페르시아의 영화를 일시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페르시아의 왕궁을 불태움으로써 자신이 진정한 페르시아의 지도자임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 이라크의 땅에 있는 페르시아 제2의 도시 바빌론에 무혈 입성한 것은 바빌론의 지도자가 알렉산드로스를 진정한 지도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이때부터 알렉산드로스는 23개 주(州)로 나눠져 있던 도시들을 페르시아 지방장관이 다스리도록 했다. 유럽(Europe)과 동방(Orient)의 문화가 충돌을 거쳐 융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바로 그리스 문화가 동방 문화에 영향을 끼친 헬레니즘(Hellenism)이 탄생하였다.
이때부터 동방원정의 공을 인정받아 페르시아의 지방도시를 다스리기를 원했던 부하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를 떠난 후에도 7년 동안 원정을 계속한다. 알렉산드로스는 6천 미터의 고봉들이 즐비한 힌두쿠시 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에 위치한 세계 문화의 교차로이자 교역의 중심지 사마르칸트(Samarkand), 현재의 아프카니스탄 수도인 카불(Kabul)을 거쳐 인도의 인더스 강 지류인 베아스 강에 이르렀다. 베아스 강 건너에는 인도 군이 집결해 있었다. 그곳에서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며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을 거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어쩔 수 없이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가야했다.
그 후 3년 뒤 알렉산드로스는 열병에 걸려 총 11년에 걸친 원정을 끝내고 기원전(B.C.) 323년 페르시아 제2의 도시 바빌론에서 33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가 생전에 단행한 대원정은 3만㎞에 달했다. 그는 정복했던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고 칭했다. 그 당시에는 무려 70여 개의 알렉산드리아가 존재했으나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한 도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유일하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그리스, 이집트, 동부 아시아 그리고 가장 멀리 떨어진 인도가 세상의 전부인 것으로 알았다. 스페인이 남미대륙을 정복할 당시 그리스도교를 전파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알렉산드로스도 그리스 문명을 미개한 동방국가에 전파한다는 사명감을 가졌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러한 사명감을 갖게 된 이유는 아테네에서 초빙된 개인교사 소크라테스(Socrates) 때문이었다.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그리스 문명만이 세계 최고의 문명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물론 동방원정 중에 알렉산드로스는 동방문명도 그리스 문명에 못지않은 훌륭한 문명임을 깨닫고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된다. 어찌됐든 알렉산드로스는 당시 그리스 인들이 세상의 끝으로 알고 있던 인도까지 동방원정을 단행하여 성공했다. 그러니 그에게 대왕(the Great)의 칭호가 붙는 것이 당연시됐다.
신탁이 실현된 고르디우스의 매듭인 양 비비 꼬여진 타래난초
알렉산드로스는 유럽에서 아시아에 이르는 대제국 건설을 통해 동서 문명의 충돌과 융합이라는 굴곡의 역사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우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내려진 신탁이 실현된 것이다. 고르디우스는 ‘황금의 손, 즉 마이더스의 손(The Midas Touch)’으로 유명한 미다스의 부왕(父王)이다. 고르디우스의 아들 미다스 왕에 대한 이야기는 갈대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타래난초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꼬여있다. 실타래를 꼬아 만든 매듭, 그 매듭과 실타래를 닮은 타래난초는 마치 사촌인 양 잘 어울린다. 한방에서는 타래난초를 용구(龍拘)라 하여 종기 치료와 기침을 완화시키는 진해제로 사용한다. 또한 병을 앓고 난 후 허약할 때 이 풀을 사용하기도 한다.
무더위를 식혀주던 가랑비가 그쳤다. 그 적은 비에도 산 속의 풀과 나무는 축축이 젖은 팔을 벌리고 상쾌한 기운을 내뿜는다. 어렸을 때 발에 채이게 흔하던 달개비가 풀밭 한 가운데에서 푸르른 색을 강렬하게 발산하고 있다. 이슬을 머금은 꽃잎은 뭔지 모를 청초함이 스며있었다.
달개비를 야생화로 여기지도 않았던 내가 언제부턴가 고개를 숙이고 쪼그려 앉아 달개비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닭의 벼슬처럼 파란색 귀를 쫑긋 세운 모습이 이채롭다. 달개비는 닭을 키우던 시골의 닭장 근처에 많이 자란다고 해서 닭의장풀이라고도 부른다. 닭똥의 양분을 잘 흡수해서 일까?
농촌에서는 잡초라고 뽑아버리지만 끈질긴 생명력으로 피어나고 다시 또 피어나는 달개비는 어떠한 수난(受難)에도 굴하지 않는 진정한 야생초다. 꽃의 수명은 유난히 짧다. 하지만 꽃은 교대로 계속 피어나 없어지지 않는다. 달개비 꽃은 화려한 하루를 보낸 뒤 다음날 자신의 몸을 녹여 아침이슬과 함께 어우러진다. 꽃잎이 녹아버린다는 얘기다.
그러니 달개비 군락지를 발견해도 꽃은 단 몇 송이밖에 없을 것이다. 화려한 꽃으로 단 하루만 인간들의 눈을 즐겁게 해 줘서 일까? 꽃말이 ‘순간의 즐거움’이다. 하지만 나의 가슴에 새겨진 꽃은 영원한 즐거움으로 남는다.
아침이슬에 젖은 닭의장풀
달개비, 즉 닭의장풀에는 황당한 전설이 전해진다. 내기를 좋아하는 두 남자가 끊임없이 내기를 하고 있었다. 팔씨름, 돌 던지기는 물론 각종 시합을 하면서 내기를 계속했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비기기만 하였다. 이들은 최종적으로 한 밤중에 돌을 껴안고 물속에 들어가 누가 오래 버티는지 시합을 하기로 했다.
두 남자의 아내들은 승부욕이 강한 두 사람이 끝내 물 밖으로 나오지 않고 버틸 것이기 때문에 그중 한 사람은 날이 밝으면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아내는 날이 밝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녀들은 수탉이 울면 새벽이 밝아 올 것을 염려하여 닭장 주변에서 서성이며 애를 태웠다.
너무 걱정을 한 탓일까? 그만 부인 중 한 명이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얼마나 걱정했으면 애가 타서 죽었을까! 그제 서야 두 남자는 내기시합을 중단했으나 이미 늦었다. 해가 가고 새봄이 밝아오자 아내가 죽은 자리에서 달개비, 즉 닭의장풀이 피어났다는 것이다.
달개비의 학명은 Commelina communis L.이다. 린네(Linne)는 식물에 학명을 처음 붙이기 시작한 식물학자다. 그는 나라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꽃을 하나의 이름으로 통일시켜 구분하기 수월하게 하기 위해 학명을 붙였다. 달개비는 꽃잎이 2장만 쫑긋 솟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래쪽에 반투명으로 보일듯 말듯한 꽃잎 1장이 더 있다는 사실이 린네에게는 퍽이나 재미있었다.
그래서 그는 달개비에 꼼멜리나(Commelina)라는 속명을 지어 주었다. 그렇다면 이 속명은 어디에서 착안했을까? 17세기 네덜란드에는 꼼멜린(Commelin)이라는 3명의 동명이인 식물학자가 있었다. 이들 식물학자중 두 명은 활발한 활동을 하였지만, 나머지 한 명은 뚜렷한 성과 없이 조용히 지냈다.
두 개의 큰 꽃잎과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꽃잎 1개를 달고 있는 달개비가 3명의 식물학자의 활동상과 비슷하지 않은가! 그래서 린네는 달개비의 속명에 이들 식물학자의 이름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