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를 식혀주던 가랑비가 그쳤다. 그 적은 비에도 산 속의 풀과 나무는 축축이 젖은 팔을 벌리고 상쾌한 기운을 내뿜는다. 어렸을 때 발에 채이게 흔하던 달개비가 풀밭 한 가운데에서 푸르른 색을 강렬하게 발산하고 있다. 이슬을 머금은 꽃잎은 뭔지 모를 청초함이 스며있었다.
달개비를 야생화로 여기지도 않았던 내가 언제부턴가 고개를 숙이고 쪼그려 앉아 달개비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닭의 벼슬처럼 파란색 귀를 쫑긋 세운 모습이 이채롭다. 달개비는 닭을 키우던 시골의 닭장 근처에 많이 자란다고 해서 닭의장풀이라고도 부른다. 닭똥의 양분을 잘 흡수해서 일까?
농촌에서는 잡초라고 뽑아버리지만 끈질긴 생명력으로 피어나고 다시 또 피어나는 달개비는 어떠한 수난(受難)에도 굴하지 않는 진정한 야생초다. 꽃의 수명은 유난히 짧다. 하지만 꽃은 교대로 계속 피어나 없어지지 않는다. 달개비 꽃은 화려한 하루를 보낸 뒤 다음날 자신의 몸을 녹여 아침이슬과 함께 어우러진다. 꽃잎이 녹아버린다는 얘기다.
그러니 달개비 군락지를 발견해도 꽃은 단 몇 송이밖에 없을 것이다. 화려한 꽃으로 단 하루만 인간들의 눈을 즐겁게 해 줘서 일까? 꽃말이 ‘순간의 즐거움’이다. 하지만 나의 가슴에 새겨진 꽃은 영원한 즐거움으로 남는다.
달개비, 즉 닭의장풀에는 황당한 전설이 전해진다. 내기를 좋아하는 두 남자가 끊임없이 내기를 하고 있었다. 팔씨름, 돌 던지기는 물론 각종 시합을 하면서 내기를 계속했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비기기만 하였다. 이들은 최종적으로 한 밤중에 돌을 껴안고 물속에 들어가 누가 오래 버티는지 시합을 하기로 했다.
두 남자의 아내들은 승부욕이 강한 두 사람이 끝내 물 밖으로 나오지 않고 버틸 것이기 때문에 그중 한 사람은 날이 밝으면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아내는 날이 밝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녀들은 수탉이 울면 새벽이 밝아 올 것을 염려하여 닭장 주변에서 서성이며 애를 태웠다.
너무 걱정을 한 탓일까? 그만 부인 중 한 명이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얼마나 걱정했으면 애가 타서 죽었을까! 그제 서야 두 남자는 내기시합을 중단했으나 이미 늦었다. 해가 가고 새봄이 밝아오자 아내가 죽은 자리에서 달개비, 즉 닭의장풀이 피어났다는 것이다.
달개비의 학명은 Commelina communis L.이다. 린네(Linne)는 식물에 학명을 처음 붙이기 시작한 식물학자다. 그는 나라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꽃을 하나의 이름으로 통일시켜 구분하기 수월하게 하기 위해 학명을 붙였다. 달개비는 꽃잎이 2장만 쫑긋 솟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래쪽에 반투명으로 보일듯 말듯한 꽃잎 1장이 더 있다는 사실이 린네에게는 퍽이나 재미있었다.
그래서 그는 달개비에 꼼멜리나(Commelina)라는 속명을 지어 주었다. 그렇다면 이 속명은 어디에서 착안했을까? 17세기 네덜란드에는 꼼멜린(Commelin)이라는 3명의 동명이인 식물학자가 있었다. 이들 식물학자중 두 명은 활발한 활동을 하였지만, 나머지 한 명은 뚜렷한 성과 없이 조용히 지냈다.
두 개의 큰 꽃잎과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꽃잎 1개를 달고 있는 달개비가 3명의 식물학자의 활동상과 비슷하지 않은가! 그래서 린네는 달개비의 속명에 이들 식물학자의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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