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가 찾아올 즈음인 11월 마지막 날 시냇가 주변 질펀한 땅에 길쭉이 솟아난 푸르른 갈대가 바람에 고개를 숙여 겸손히 인사한다. 갈대 잎을 스치는 바람결은 날카롭고 은은한 떨림의 소리를 가득 담아 귓전을 맴돈다. 갈대끼리 부딪치는 마찰음이 하모니를 이뤄 허공을 떠다닌다.
“쉬~이~이.” 이 소리 무슨 소리던가! 시링크스의 애처로운 울부짖음이 여기까지 도달했나? 전원의 목양신 판(Pan)에 쫓겨 갈대가 돼 버린 시링크스(Syrinx)의 가엾은 공명음도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지만, 일명 마이다스의 손 또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로 유명한 미다스(Midas) 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다스의 부왕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으로 잘 알려진 고르디우스였다.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는 스승 세일레노스가 실종되자 그를 찾아 헤맸다. 그런데 정확히 11일 후에 스승이 유쾌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디오니소스는 스승에게 실종됐던 사유를 물었다. 세일레노스는 술에 취해 길을 잃고 헤메던 중 농부들에게 붙잡혀 미다스(Midas)의 왕궁에 까지 끌려갔던 사실을 얘기했다. 그러나 미다스 왕은 자신에게 열흘 동안 연회(宴會)를 베풀어 주며 환대했다고 말했다.
디오니소스는 만취되어 헤매던 자신의 스승을 극진히 대접해 준 미다스 왕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는 미다스 왕에게 어떤 소원이든 한 가지를 들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미다스는 자신이 만지는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말했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의 소원이 현명하지 못하다며 미간을 찌푸렸지만 한 번 약속한 것을 뒤집을 수 없었다.
미다스는 왕궁 주변의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보았다. 나뭇가지는 즉시 황금으로 변했다. 다시 조약돌을 주워들었다. 결과는 역시 황금 돌로 변한 것이었다. 왕궁으로 들어온 그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닥치는 대로 왕궁의 이것저것을 만지며 쏘다녔다. 왕궁이 황금궁전으로 바뀌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배가 고팠다. 그는 부하들에게 음식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산해진미가 그 앞에 차려졌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음식을 하나도 먹을 수 없었다. 그가 음식을 집는 족족 금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미다스는 목을 축여줄 와인을 한 잔 따라 마셨다. 그러나 입으로 들어가던 액체가 단단한 금으로 변해버려 목이 뻣뻣해 져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디오니소스를 찾아가 다시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황금을 향한 탐욕(貪慾)이 결국 화(禍)를 자초한 꼴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이다스의 손’이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의 초췌한 몰골과 그의 간절한 염원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지 예전의 미다스로 돌려놓기로 했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에게 팍트롤로스 강의 원천까지 거슬러 올라가 손을 씻도록 했다. 그리고 머리와 몸을 담그고 죄를 씻어내도록 했다, 마치 기독교의 세례(洗禮)나 침례(浸禮)의식처럼.
미다스의 황금을 만드는 능력이 강물로 옮겨갔다. 팍트롤로스 강은 현재의 터키 지역인 소아시아 중부지역에 있는 강이다. 이 강에서는 지금도 사금(砂金)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그 후에서야 미다스는 생명을 지탱해 줄 황금보다 더 귀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일을 겪은 프리기아의 왕 미다스는 갈대가 많은 전원마을에 칩거하며 시골풍의 목양신 판(Pan)을 숭배하며 지냈다. 판은 갈대를 이용하여 목동들이 부는 피리(Pan-pipe)를 만들었던 신이었다. 미다스가 섬기던 판(Pan)의 이름은 마르시아스였다. 파리스의 황금사과에서 보듯이 아름다움을 겨뤘던 여신들은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였다.
어느 날 아테나 여신은 피리를 하나 만들어 불어보았는데 그 소리가 기묘하고 신비로웠다. 아테나 여신은 헤라와 아프로디테 앞에서 피리를 불었다. 그런데 헤라와 아프로디테가 웃음을 참기 위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었다. 까닭을 모르던 아테나는 거울 앞에서 피리를 불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피리를 불기위해 입 안에 바람을 모으자 양측 볼이 빨개지며 마치 개구리 볼과 같이 부풀어 올랐다. 자신의 아름다움이 피리에 의해 농락당한 것이다. 아테나는 피리를 인간세상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누구든 그 피리를 부는 자는 큰 액운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다.
땅에 떨어진 아테나 여신의 피리를 주운 자가 바로 판(Pan) 마르시아스였다. 마르시아스는 피리를 불며 소일했다. 아테나 여신의 피리를 불어보다 그 소리에 도취돼 버린 마르시아스는 태양의 신이자 수금의 신 아폴론과 실력을 겨뤄보고자 했다. 아폴론은 올림포스 신보다 훨씬 하급 신에 불과한 마르시아스의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판은 올림포스 신과 겨루는 자들이 패배했을 경우 반드시 보복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아폴론과 마르시아스의 음악대결에 그 지역 산(山)의 신 토몰로스가 심판을 맡게 되었다. 판은 갈대피리를 불며 솜씨를 뽐냈다. 판을 숭배하던 미다스 왕은 피리소리에 감명을 받았다. 이제는 아폴론 차례였다. 아폴론은 자신의 악기인 수금을 들어 현을 뜯었다. 아폴론의 손가락이 수금의 현을 튕기자 아름답고 신비로운 곡조가 산으로 메아리쳤다. 산의 신 토몰로스는 더 들어 볼 것도 없이 아폴론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미다스는 자신이 숭배하는 판의 피리소리가 더 좋았다며 토몰로스의 판정에 불만을 표시했다. 아폴론은 음악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인간의 귀를 그냥 놔둘 수 없다며 미다스의 귀를 잡아 당겼다. 미다스의 귀는 길쭉하게 늘어나 털이 솟아올랐다. 미다스는 창피한 마음에 귀를 숨기고 다녔다. 그러나 머리를 손질하는 이발사만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다스는 자신의 전용 이발사에게 절대 비밀을 엄수하라고 명령하고, 만약 이 사실을 발설할 경우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예나 지금이나 영원히 숨겨지는 비밀은 없는 것 같다. 이발사는 왕의 비밀을 말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그러다 어느 날 무성한 갈대밭에 구덩이를 파고 “미다스 왕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목청껏 소리쳤다. 그 후 바람이 갈대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이파리가 부딪치며 마치 이발사가 외쳤던 소리처럼 들렸다고 한다.
다른 설(說)로는 남편의 머리를 손질해 주던 왕비가 남편의 비밀을 갈대밭에서 소리쳤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아폴론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마르시아스는 어찌됐을까? 아폴론은 하급 신에 불과한 마르시아스가 올림포스 신에게 도전한 책임을 물어 산 채로 껍질을 벗겨 버렸다.
우리나라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신라 경문왕이 당나귀 귀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갈대밭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경문왕의 비밀을 소리친 것도 미다스 왕의 사례와 동일하다. 삼국유사는 불교적 색채가 강한 설화다. 경문왕의 귀가 정말 당나귀 귀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아마도 정적들이 경문왕을 흠집내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리라. 아니면 귀가 다른 사람보다 좀 더 길쭉했거나.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Polis)들과 우리나라는 너무도 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는데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산들바람이 갈대밭을 스쳐 지나간다. 시링크스의 서글픈 하소연과 미다스의 비밀이 들리는 지 가만히 귀 기울여 본다. 갈대의 꽃말은 ‘신의, 믿음, 지혜’다. 갈대의 어린 순은 죽순처럼 식용으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한방에서는 소염, 이뇨, 해열, 해독, 숙취해소 등에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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