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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말선초에는 그 지역의 군사들이 그 지역을 지키는 진관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조 이후부터는 내륙 방어를 위해 군사적으로 특수한 지역에 진(鎭)을 추가로 설치하고 중앙의 관리를 파견했다.

백령도의 최고 명소는 두무진이랍니다. 백령도는 옛 진관체제 하의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했죠. 그래서 진(鎭)이 붙은 겁니다. 두는 머리 頭자이고 무는 무관의 武자이므로 갑옷을 입은 무장의 머리와 같은 곳이라는 뜻이죠.

두무진 트레킹로(路)의 우측에는 군사시설인 교통로가 보입니다. 이곳은 최북단 섬이기 때문에 방어시설이 잘 구축되어 있습니다.

길 옆에는 붉은 색의 해병대 안내판이 보이며, 그 곁에서 담쟁이덩굴이 평화롭게 자라고 있습니다.

저 멀리 방파제 안쪽으로는 관광유람선이 두무진항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바다 가운데의 바위, 즉 시스택을 보면 육중한 갑옷을 입은 무장이 서 있고 그 꼭대기가 머리처럼 보이죠. 그래서 두무진(頭武鎭)이라 불렀답니다. 무장의 머리라는 의미로요. 진(鎭)은 군사적 도시라는 의미이구요.

풍화작용으로 떨어져 나간 수직단애는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바다 저 멀리 수평으로 보이는 산들이 북한 땅입니다. 지척에 북한이 있는 곳이죠.

그러니 북한군의 침투를 감시할 초소가 필요했을 겁니다. 우리 군 초소도 세월의 나이를 비켜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상당히 낡아 보이기 때문이죠.

형제바위로 가는 계단입니다. 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가팔라서 이곳을 내려갔다 올라오면 저절로 가쁜 숨을 몰아 쉬게 된답니다.

내려가는 계단 중간 쯤에서 형제바위를 바라보는 한 사람이 보입니다. 풍경과 어우러진 사람의 모습이 아름다워 슬쩍 한 컷 촬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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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장면은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그냥 감상할 따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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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형제바위에 이어 용트림바위를 소개합니다. 발을 바닷물 속에 딛고 물 위로 우뚝 선 용트림바위는 마치 용이 승천하기 위해 몸을 비비 틀고 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지형학적으로 암석 중 무른 부분은 풍화 침식작용에 의해 떨어져 나가고 오로지 단단한 부분만 바닷가 남아 있는 것을 시스택(sea stack)이라 부릅니다. 용트림바위가 바로 Sea Stack입니다.

본 섬에 연륙되지 않고 외톨이로 떨어진 것을 바로 시스택이라 부르는 거죠. 이러한 것들이 하나, 둘 또는 셋이 모여 있기도 하답니다. 형제바위는 두 개의 시스택이 함께 있었던 거죠.

용이 승천하려고 몸을 비틀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여기서 몸을 위로 솟구쳐 도약하면 승천하는 거죠.

승천하려던 용이 강렬한 햇빛에 눈이 부셨는지 몸만 비비 틀고 앉아서 승천을 주저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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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30일 10시08분에 백령도에서 촬영한 사진

어느 날, 컴퓨터의 자료를 정리하던 중 많은 사진자료가 삭제되어 버렸다. '아차~!' 싶어 복구하자니 컴퓨터 본체를 강남으로 보내야 하고...... 그냥 남은 사진이나 찾아 보자는 식으로 하드 드라이브를 이곳 저곳 서핑하다 보니 서너 장의 사진이 발견된다. 그 중 특이한 사진을 이곳에 올려본다. 

[(세멘트로 덧칠하여 보이지 않지만 반공) 방첩, 신고하여 애국하고 유신으로 번영하자]

간첩을 막아내자는 방첩, 그 간첩을 잡기 위해 신고를 생활화하며, 유신을 실천하여 나라를 번영시키자는 내용이다.  

지금은 창고로 쓰이는 듯한 시멘트 경량벽돌의 벽면에 페인트로 쓰여진 글귀였다. 지난 2014년 10월 30일 10시08분에 백령도의 용기포 항으로 진입하는 항구 주변 집 뒤편에서 발견하고 사진으로 남긴 것이었다.  1970년대에는 도처에서 이러한 구호들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자료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과거  내가 초.중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10월 유신이 나라를 구하기 위한 대통령의 특별선언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당시 급격한 산업화로 금융공황적 자금난, 저임금 등으로 인한 생존권 문제 대두, 닉슨 독트린으로 인한 미국 개입정책의 후퇴 등으로 북한에 대처하고 경제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우리만의 자구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명목이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여졌기 때문이었다.  

10월 유신의 긍정적인 측면은 경제적 도약의 기반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물론 노동자들의 값싼 임금과 노동운동 및 정치활동 제한 등의 부작용이 뒤따랐다. 이러한 문제들을 차치하고 경제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자면, 지금 우리의 경제적 발전이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개발효과를 톡톡히 봤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다.  

세멘트로 덧칠되어 없어진 반공 글자 자리

당시에는 북한보다 못 살았지만 지금은 경제적으로 북한보다 풍요롭고, 세계에서 인정받는 나라로 발돋음했다. 물론 당시의 정치적 목적도 간과할 수 없지만 남의 허물을 들쳐내서 뭐 하겠는가? 그냥 그때를 회상하며 옛 추억에 잠겨보고 싶을 뿐이다. '모든 것은 생각하는 대로 이뤄진다'는 생각으로 긍정적인 마음을 갖기로 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긍정적이면 몸도 긍정적으로 변한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은 얘기하고 싶다, 아래의 글처럼.

유신체제가 비난받는 이유는 1971년 12월 6일 취해진 '국가비상사태 선언'에서 '첫째도 안보, 둘째도 안보, 셋째도 안보'라는 내용을 밝히면서,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첨부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다음 해 12월 27일 유신헌법이 개정, 공포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인간은 반인륜적 범죄 등과 같은특정한 아주 특별한 사안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이유로든 자유의 일부가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칫 오만과 독선에 빠지기 쉽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다수결의 원칙이다. 승자의 원칙인 다수결은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며 짓밟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잘못하면 독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지 않도록 끊임없는 대화와 소통을 통해 소수의 자유도 보호하도록 개개인들이 자신의 인격을 고양시키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사회는 아름답고 매력 넘치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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