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수면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 사이에서 수면 장애는 점점 흔한 문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특히, 국내 성인 10명 중 4명이 경험할 정도로 흔한 증상인 코골이는 단순히 수면 중 발생하는 소음으로만 치부하기엔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질환입니다.
코골이는 왜 발생할까요?
코골이는 수면 중 호흡 기류가 좁아진 기도를 통과하면서 목젖이나 연구개 같은 주변 구조물이 진동하며 소리를 내는 증상입니다. 주된 원인은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이지만, 이외에도 과체중, 과도한 음주, 턱 구조의 문제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코골이가 위험한 이유
코골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이로 인해 수면의 질이 저하되고 함께 잠을 자는 사람의 숙면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코골이를 앓는 환자의 약 3분의 1이 수면무호흡증을 동반한다는 점입니다.
수면무호흡증은 잠을 자는 도중 10초 이상 숨을 쉬지 않는 상태가 시간당 5회 이상 반복되는 질환입니다. 이는 뇌에 산소 공급을 방해해 고혈압, 뇌졸중, 부정맥, 치매 등의 심각한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으며, 심할 경우 돌연사로 이어질 위험도 있습니다.
정밀한 진단이 필수입니다
코골이나 수면무호흡증이 의심된다면 수면클리닉에 방문해 정밀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널리 시행되는 검사 방법은 수면다원검사로, 뇌파, 심전도, 수면 중 호흡 곤란의 횟수 등을 체크해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효과적인 치료 방법
코골이나 수면무호흡증으로 진단된 경우, 비수술적인 치료법인 양압기 치료가 대표적인 선택지입니다. 양압기는 공기 압력을 이용해 기도가 막히는 것을 방지하며, 현재 가장 효과적이고 정확한 치료 방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생활 속 관리도 중요합니다
코골이와 수면무호흡증은 초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치료와 더불어 규칙적인 수면 습관을 들이고, 과식이나 음주를 피하는 것 또한 증상 개선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내 몸을 위한 작은 관심이 수면의 질을 높이고, 건강한 일상을 되찾는 첫걸음입니다. 코골이나 수면무호흡증이 의심된다면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세요!
만조 때는 감히 발길조차 닿을 수 없는 곳, 물이 차오르면 섬은 고립되어 버린다. 그러나 물이 빠진 해변을 따라 걷다 보면, 끝섬에 다다를 수 있다. 가롯 유다의 이름을 딴 이 작은 섬은, 그의 비극적이고도 어두운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끝섬에 발을 들이면,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고딕 양식의 아담한 집이 눈앞에 펼쳐진다. 첨탑과 기와가 어우러진 지붕은 마치 묵직한 침묵 속에서 속죄와 반성을 속삭이는 듯하다.
그 앞에는 나선형으로 꼬아 올린 벽돌 종루가 서 있다. 이 종루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그것은 이곳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여정을 기념하며, 또한 순례자들의 마음을 울리는 소리로 삶을 돌아보게 한다.
열두 번의 종소리를 울릴 때마다, 순례의 발걸음이 12km의 길을 걸어온 여정을 마무리했음을 깨닫는다. 종소리는 순례의 끝을 알리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암시한다. 고요한 섬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가롯 유다의 비극적인 선택과,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의 뒤틀리고 꼬인 삶을 마주보게 한다.
‘가롯 유다의 집’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각자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후회와 속죄를 떠올리게 하며, 돌아가야 할 삶의 자리로 순례자를 이끈다.
그곳에서 나는 예수께 입맞춤하던 유다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돈주머니를 쥔 그의 손, 그리고 스승을 배신했던 그 찰나의 선택. 그는 비록 어둠 속으로 사라졌으나, 그가 남긴 이야기는 오늘도 끝섬에서 새겨지고 있었다.
붉은 종루 아래에서 마지막 종을 치며, 나는 그곳에 온전히 서 있었다. 가롯 유다의 고독이 깃든 곳에서, 내게도 깊은 고독과 회복의 기회가 주어졌음을 느꼈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순례길에서 배운 성찰과 회복의 의미를 품고 살리라고.
가롯 유다의 집은 끝섬에 있지만, 어쩌면 우리의 마음 한구석 끝자락에도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몬의 집은 문이 없다. 뻥 뚫린 구조라 시원한 바닷바람이 마음껏 드나든다. 그 바람은, 마치 시몬 자신처럼 속박 없이 자유롭다. 섬티아고 순례길의 열한 번째 작은 교회에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벤치에 앉아 넓게 펼쳐진 갯벌을 바라보며, 그가 걸었던 길을 상상해 본다.
그는 “가나나인 시몬” 혹은 “셀롯”이라 불렸다. 그의 이름에는 그의 정체성이 깃들어 있다. 그는 갈릴리에서 태어나 로마의 압제 속에 자랐다. 열정적이고 정의로운 그의 마음은 가난하고 억눌린 동포들을 위한 저항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그가 속했던 셀롯당은 로마에 대항하며 유대인의 자유를 외쳤다. 그들에겐 모든 것이 투쟁이었다. 칼과 피로 이루어진 해방이 전부인 시대였다.
하지만 그의 삶은 단순한 저항의 연속이 아니었다.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또 다른 열정을 깨달았다. 그 열정은 단지 칼로 이루는 정의가 아닌, 사랑으로 이루는 해방이었다.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한 순간, 시몬의 발걸음은 세상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는 가롯 유다와 같은 공동체에서 생활했으며,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제자들과 함께 복음의 메시지를 품었다. 그의 과거는 이제 주님 안에서 새로운 목적을 찾았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동안, 시몬은 자신의 열정과 신앙이 시험받는 순간들을 마주했다. 로마에 대한 분노와 복음에 대한 헌신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그는 마침내 사랑과 평화가 진정한 해방의 길임을 깨달았다.
시몬은 주님이 떠난 후, 복음을 들고 더 먼 곳으로 나아갔다. 그의 여정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처럼 끊임없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페르시아나 이집트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그 길 위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열정을 잃지 않았다. 그 열정은 이제 칼이 아닌 복음의 불꽃이었다.
그의 집은 그래서 문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문이 없어야만 자유롭게 바람이 드나들고, 사람들도 두드림 없이 들어올 수 있으니까. 그의 삶 자체가 그렇게 열려 있었다. 그는 누구든 받아들이고, 누구와도 함께하며, 복음을 나누었다.
나는 바닷바람 속에서 시몬의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 그의 열정과 믿음이 이 작은 예배당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 시몬은 지금도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순례자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의 여정은 끝난 것이 아니라, 나의 길 위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루가 복음 6장 16절과 사도행전 1장 13절의 12사도 명단을 보면 그의 이름은 유다(Judas)이고,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에서는 타대오라 부르나 분명한 것은 그가 가리옷(가롯) 사람 유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둣길을 따라 소악도에서 진섬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면, 고즈넉한 풍경 속에 자리한 유다 다대오의 집이 문득 눈길을 사로잡는다. 뾰족한 지붕과 하얀 벽은 햇빛을 받아 빛나며, 그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과 대조를 이루어 마치 영원의 경계를 암시하는 듯하다. 순례자의 발걸음을 머물게 하는 이 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2000년을 거슬러 이어진 믿음의 이야기를 오롯이 품고 있다.
유다 다대오,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으로 흔히 '유다'라는 이름 때문에 '가롯 유다(유다 이스카리옷)'로 오해를 받곤 하지만, 그의 삶은 온전히 신실함과 헌신으로 채워져 있다. '다대오'라는 별칭은 그의 부드럽고 열정적인 성품을 의미한다고 전해진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증언하며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던 제자였다.
특히 그의 이름은 소외된 자와 희망을 잃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으로 빛난다. 초대 교회에서 다대오는 안티오키아,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등지로 복음을 들고 나아갔다. 그가 지나간 길에는 따뜻한 환대와 치유의 흔적이 남았다. 그는 끝내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했지만, 그의 흔적은 전해지는 기도와 전승 속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있다.
진섬 삼거리에서 그를 기리는 공간을 마주하면, 유다 다대오가 남긴 희생과 헌신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순례자의 마음은 어느새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묻는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 물음 속에서, 다대오의 생애는 우리에게 사랑과 희망을 가르친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하늘과 바다의 경계처럼 뚜렷한 신앙의 길이 떠오른다. 유다 다대오, 그의 이야기는 고요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우리 마음에 새겨진다. 삶의 여정 속에서 때로 흔들릴지라도, 그의 믿음과 사랑이 우리가 나아갈 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준다.
신안 섬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보면, 12사도의 이름을 딴 12개의 작은 예배당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중 9번째에 위치한 '소원의 집'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小 야고보'를 기리는 공간입니다.
마가복음 15장 40절에서 처음 등장하는 알패오의 아들인 '작은(小)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인 '大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성경에는 그의 구체적인 행적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의 부활 후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섬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소원의 집, 즉 작은 야고보의 집은 마치 작은 야고보 사도의 삶을 닮아 있습니다. 눈에 띄는 사건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믿음을 지키며 살았던 그의 삶처럼, 소원의 집 또한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지만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묻혀 있습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은 세배대의 아들인 大야고보의 무덤을 찾아가는 순례길이지만 이곳은 小야고보의 집이 9번째 코스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산티아고와 섬티아고는 크고 작은 야고보의 집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점에서 공통점 아닌 공통점이 있는가 봅니다.
소원의 집은 기쁨의 집을 지나 소악도를 향해 조금 더 걸어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마치 소원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 작은 산을 꺼이꺼이 넘어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냥 포장길로 걸어가면 가깝지만 산을 돌아 가는 코스가 낭만적이라 그 길을 택했죠.
작은 야고보의 집 안으로 들어서면, 신발을 벗고 정갈하게 다듬어진 나무 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물고기 형상을 한 창문과 소악도의 돌은 마치 섬에 사는 어부들의 마음을 담은 듯 따뜻한 감성을 자극합니다.
이곳에서 나는 한참 동안 눈을 감고 나의 소원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한 공간에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솔한 기도가 하늘에 닿는 듯했습니다.
신안 섬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소원의 집은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소망과 꿈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끄는 성스러운 공간이었습니다.
나르시시즘은 현대 사회에서 점점 더 많이 언급되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기애적 성격 특성을 지닌 사람들로, 그들의 행동은 종종 처음에는 쉽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들은 관계의 초기 단계에서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면에 숨겨진 특성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지 않을 때 극심한 불안감을 느끼거나,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결여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행동 패턴을 이해하는 것은 건강한 대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나르시시스트는 머릿속에 '나는 특별한 존재다'라는 확고한 자아상을 심어놓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타인을 희생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핑계를 만들어 내며, 절대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나르시시스트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반영하며,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언제나 '나'
나르시시즘 성격 장애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의 성취를 과장하거나 허세를 부리는 경향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나르시시스트가 주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자신을 그룹 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묘사하거나, 직장에서 최고의 능력을 가진 직원으로 내세우며, 친구들 사이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사람으로 포지셔닝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과장은 그들이 내면의 불안과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작용하며, 자신을 이상화함으로써 자존감을 높이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데도 조언 남발
나르시시스트는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조언을 하며, 이를 통해 자신이 그룹 내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고자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그들이 느끼는 '우월감 콤플렉스'와 관련이 있습니다.
선행 연구에 따르면,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을 돕는다는 명목 아래 자신의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타인의 의견이나 감정을 무시하고, 자신이 더 뛰어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려고 합니다.
자신은 언제나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항상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연락에 즉시 응답하지 않거나, 식당에서 기대하는 만큼의 특별한 서비스를 받지 못할 경우 강한 불만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하며, 특히 자주 만나는 친구나 가족에게서도 이러한 특별 대우를 요구합니다. 이러한 특성은 나르시시스트가 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끝없는 야망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지만, 자신이 특별한 운명을 지닌 위대한 존재라고 믿는 것은 나르시시즘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본질적으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바탕으로 고위층 인물들과 어울리기를 선호합니다.
이들은 동료들로부터 존경받고 특별한 대우를 받으려는 욕구가 남들보다 훨씬 강해, 지위에 대한 집착이 두드러집니다. 또한, 자신이 속하지 않은 그룹의 사람들을 경시하는 경향도 흔히 나타납니다. 이러한 태도는 대인 관계에서 갈등을 유발하고, 나르시시스트가 주변 사람들과의 건강한 소통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매력적인 행동
나르시시스트는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해 지나치게 도도하거나 벽이 높아 보이는 태도를 지양합니다. 오히려 친근한 미소와 경계를 허무는 대화에 능숙하며, 관계의 초반에는 상대방을 사로잡기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고 과한 호의와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이를 '러브 바밍(love bombing)'이라고 부르며, 마치 폭탄처럼 쏟아지는 애정 공세로 상대방을 감동시키려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은 "세상에 나를 이렇게 위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또는 "이 사람은 나를 정말 좋아하나 봐."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르시시스트가 연인이라면 상대방은 마치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환상에 빠지게 되며, 친구나 직장 동료로서의 나르시시스트는 평생 만나기 힘든 '귀인'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마움이 깊은 신뢰와 애정으로 발전할 무렵, 나르시시스트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연락을 줄이고, 호의도 감소시키며, 간헐적인 호의를 동정하듯 제공해 이미 자신을 신뢰하고 좋아하는 상대를 조종하기 시작합니다. 때때로 상대방을 주변 사람들과 고립시키기도 하며, 평가절하와 가스라이팅을 통해 상대의 자존감을 무너뜨립니다.
"너는 이래서 문제고 저래서 문제다."라는 말로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깎아내리며, 모든 문제를 상대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나르시시스트는 항상 고결한 피해자로 남고, 잘못한 것은 항상 외부 세계에 있다고 믿습니다.
타인은 도구일 뿐
나르시시스트는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을 도구나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쉽게 버리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경쟁자를 모함해 끌어내리더라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필요한 사람에게는 화사한 미소와 함께 선물과 호의를 베풀지만, 만만한 사람에게는 가혹하게 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나르시시스트'와 '나르시시스트가 아닌 사람'으로 나누는 것은 위험한 접근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이기적인 면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나르시시즘적인 행동을 보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병적인 나르시시스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구분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르시시스트는 흑백 논리와 이분법적 사고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이기심을 넘어서는 '병적인 나르시시스트'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들은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심지어 소시오패스적인 특성을 지니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물들로 인해 다양한 범죄와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정서적 학대가 발생합니다. 만약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만 커진다면, 이는 그 관계를 단절해야 할 신호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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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나르시시스트일까, 아닐까?’ 분석하고 시험할 필요는 없지만, 만약 내게 큰 고통을 주고 있는 관계가 있다면 그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악인’으로서 병적인 나르시시스트가 일반 사람이나 근사하고 매력적인 사람의 가면을 쓰고 당신 주변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상대방의 행동 패턴과 태도를 면밀히 관찰해야 합니다. 그들이 당신에게 주는 감정적 영향, 대인 관계에서의 이기적인 행동,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이중성이 모두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상대방의 행동이 지속적으로 당신의 자존감이나 정신적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그 관계를 재평가하고 필요한 경우 단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섬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만난 8번째 순례지, 소기점도에서 소악도로 이어지는 노둣길의 갯벌에 위치한 마태오의 집.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입구에서부터 황금빛 양탄자로 계단을 수놓은 듯 마치 황금 궁전에 들어서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 황금빛은 과연 마태오의 집 애칭인 기쁨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러나 기쁨의 집 안으로 들어가 사방의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 그곳에서 펼쳐진 풍경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살며시 던져 주었다. 만조 때 바다의 물결이 살랑거리고,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가 귓전에 스치면 '기쁨의 의미가 바로 이곳에 있구나'라는 깨달음이 가슴에 가득 찬다.
작은 성당에 들어서 밀물에 고립되고, 썰물에 다시 길을 걸어가는 반복의 일상. 이 과정에서 우리는 기쁨과 슬픔, 노여움와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리라. 어쩌면 인생이란 이 모든 감정을 겪으며 진정한 기쁨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기쁨의 집에서의 순간들은 그 자체로 특별하다. 노둣길 옆으로 찰랑찰랑 차오르는 바다의 향기, 바람의 속삭임, 그리고 어서 벗어나야겠다는 다양한 감정들이 어우러져 진정한 기쁨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에. 또한 완전 밀물이 될 때 마태오의 집에서 고립된 채 명상과 묵상을 하는 우리들은 천국의 기쁨을 느끼리라.
한적한 섬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시선을 사로잡는 특별한 집이 하나 있습니다. 하얀 벽과 모로코 블루가 어우러진 이곳은 마치 지중해의 어느 마을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집 외벽 한쪽에는 독특한 조각처럼 그려진 물고기와 둥근 떡이 눈길을 끕니다. 이 그림은 성경 속 오병이어 (五餠二魚) 의 기적을 상징하며,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은혜로운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더욱 경건한 분위기가 펼쳐집니다. 내부 중앙에는 제대가 자리하고, 그 뒤로는 두 개의 촛대가 나란히 진열돼 있습니다. 촛대 위로는 십자가 모양의 창문이 조용히 빛을 받아 아름다운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묵상하는 시간은 마치 영혼 깊은 곳까지 맑아지는 느낌을 줍니다.
이곳에서 도마(Thomas) 사도에 대한 묵상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도마는 그 현장에 없었기에 사도들의 증언을 의심했습니다. "그분의 못 자국을 보고,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던 그의 말은 인간적인 한계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못 자국과 옆구리를 직접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제야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며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지요. 그 뒤부터 '의심많은 도마'라는 별칭이 붙게 되죠.
예수님께서는 그런 도마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말씀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이 집은 "인연의 집"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많은 신혼부부가 사진 촬영 장소로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얀색과 모로코 블루의 조화로운 색감은 누군가에게는 성경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모로코의 낭만적인 카사블랑카의 풍경을 연상시킵니다.
마치 사랑과 믿음이 교차하는 이곳에서, 당신도 잠시 시간을 멈추고 깊은 묵상과 싱그러운 추억을 담아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