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빨강 단풍잎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 겨울을 나기 위해 제 잎을 벌겋게 물들이며 점차 잎을 떨구는 가을나무를 뒤로하고 낙엽을 밟으며 산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가을빛에 겨워 만개한 산국과 미역취의 샛노란 꽃무리가 점차 퇴색되어가는 가을 산의 쓸쓸함을 채워주고 있다.
볕 잘 드는 산비탈에 멀쑥이 긴 꽃대를 들어 올린 산부추가 둥근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서서히 영글어 가고 있다. 녹색줄기와 붉은 자주색의 꽃이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물감을 뿌려놓은 듯 원형으로 흩어진 꽃 송이송이에 벌이 떼로 달려든다. 산부추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벌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비틀고 있다. 아마도 가을바람의 장난이리라.
홀로 긴 꽃대를 밀어 올려 둥글게 피어 있는 고고한 모습에서 신선들의 자태를 연상했을까? 아니면 매콤한 산부추의 맛이 신선들이 먹기 좋아서 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산부추의 꽃말은 ‘신선’이다. 그러고 보니 산부추의 생김새가 공중에서 원을 그리며 터지는 불꽃처럼 생겼다. 신들의 불꽃놀이~! 그렇다면 언제 제우스의 번개가 불꽃처럼 튀어 올랐던가?
제우스를 주축으로 한 올림포스 신들과 크로노스의 형제들인 티탄(Titan) 신들이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때 키클롭스 형제들은 제우스가 자신들을 지옥에서 꺼내준 대가로 번개, 삼지창, 보이지 않는 투구를 만들어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에게 각각 선물했다. 제우스는 강력한 번개를 날려 티탄 신들을 위협했고, 포세이돈은 삼지창을 높이 휘둘러 싸움에서 주도권을 잡았으며, 하데스는 보이지 않는 투구를 쓰고 티탄 신들을 괴롭혔다.
또한 백 개의 손을 가진 헤카톤케이레스 3형제도 무한지옥 타르타로스에서 해방된데 대한 보답으로 한 번에 수백 개의 돌덩이를 티탄 신들이 있는 오크리스 산으로 던졌다. 티탄 신들은 돌 뒤에 숨기 바빴다. 이때 제우스는 티탄 신들이 숨어있는 큰 돌을 향해 번개를 날렸다. 반발력 탓에 돌에 부딪친 벼락은 붉은 자주색을 띠며 스프링처럼 하늘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하늘에서 산산이 부서지며 주변으로 흩어졌다, 마치 산부추처럼. 그야말로 신들의 불꽃놀이였다.
번갯불 파편이 홍자색을 띤 것은 마찰열 때문이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꽃 파편 아래에서 티탄 신들은 자신들의 열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티탄 신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거인족 기간테스(Gigantes)와 지하심연의 괴물 티폰(Typhon)을 전쟁에 끌어들이지만 모두 올림포스 신들에 의해 제압된다.
결국 올림포스 신들은 티탄 신들과의 전쟁인 티타노마케아(Titanomacheia), 거인족 기간테스와의 전쟁인 기간토마케아(Gigantomacheia), 그리고 괴물 티폰과의 대결 등 3단계의 전쟁을 통해 완전히 권력을 장악한다. 이들과의 전쟁에서 제우스의 번개는 목표물에 명중한 다음 산산이 부서지곤 했다. 그 부서지는 불빛이 신들의 불꽃놀이 그 자체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백합과(科)의 여러해살이 풀인 산부추는 홍자색의 꽃송이들이 수십 개 모여 둥근 한 송이 꽃으로 거듭난다. 꽃향기가 좋고 꽃가루가 많아서 벌들이 몰려들기에 안성맞춤인 밀원(蜜源)식물이다. 이른 봄 땅을 헤집고 올라오는 잎과 뿌리가 마치 달래와 같다 해서 산달래라고도 부른다. 잎과 뿌리를 된장에 넣어 끓이면 얼큰한 향과 맛이 구수함을 더해 줘 입맛을 돋우는데 제격이다.
산부추의 맛은 시고 맵고 떫지만 독성이 없고 따뜻하다. 독이 없는 야생초들은 모두 자신들만의 약효를 갖고 있다. 산부추도 몸속을 따뜻하게 해줘 소화불량, 천식, 가슴앓이, 협심증에 좋다고 한다. 또한 간과 심장에 좋은 식물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특히 민간에서는 생즙을 내어 복용하면 공부에 찌든 청소년들의 뇌를 건강하게 만든다고 믿고 있다. 물론 효과가 있다고 하니 수험생을 둔 학부모라면 한 번쯤은 관심을 가져 볼만한 야생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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